국내 배터리 3사가 최대 시장이자 핵심 생산 거점인 북미에서 합작 사업을 잇따라 정리하면서 전면적인 사업 재편에 돌입했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수조~수십조 원 규모 배터리 장기 공급 계약을 맺고, 합작 법인과 생산 기지를 만들어온 기존의 성공 방정식을 폐기하고 있는 것이다.

SK온 SK온과 미 포드의 배터리 생산 합작 법인인 ‘블루오벌SK’의 테네시주 공장 전경. SK온은 포드의 전기차 전략 축소 등 시장 침체를 고려해 법인 청산을 결정했다. LG에너지솔루션도 북미 거점에서 GM, 혼다 등 완성차 파트너와 조 단위 사업 재편에 들어가는 등 K배터리 업계 전반에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전기차 전환 감속(減速) 정책과 맞물려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한국 배터리 업계는 단일 고객에 묶여 있던 리스크를 털어내고 단독 생산을 통한 생존 공식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공 공식이던 ‘합작 모델’, 변곡점 맞아

최근 K-배터리의 북미 전략은 ‘확장’에서 ‘효율’로 급선회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합작 법인의 해체와 독자 전환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합작 법인 효율화에 나서고 있다. 지난 24일 혼다와 설립한 미국 합작사 ‘L-H 배터리 컴퍼니’의 건물·장치 등 각종 자산을 혼다 미국 법인에 약 4조2212억원에 매각하며 현금 확보에 나섰다. 지난 5월 GM과 만든 합작사 ‘얼티엄셀즈’의 3공장은 반대로 3조134억원을 주고 인수해 단독으로 쓰기로 했다. 합작 공장에선 GM 전기차용 배터리만 만들어야 하지만, 단독으로 공장을 운영해 GM 외 다른 완성차 고객도 받겠다는 것이다.

그래픽=이진영

SK온은 포드와 만든 미국 합작 법인 ‘블루오벌SK’를 지난 11일 아예 해체하기로 했다. 합작 법인이 갖고 있던 테네시주 공장은 SK온이, 켄터키주 공장은 포드가 각자 독립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수년 전만 해도 배터리 기업과 완성차 업체의 합작은 ‘성공 보증수표’로 통했다. 배터리 기업은 안정적인 납품처를, 완성차 업체는 수급 불안을 해소하는 윈윈(Win-Win) 구조였다. 하지만 전기차 성장세가 꺾이자 견고했던 배터리 동맹은 서로에게 족쇄가 됐다. 완성차 업체가 감산을 결정하면 배터리 공장 가동률이 급락해 배터리 기업은 손해를 떠안고, 완성차 업체는 가동도 안 되는 배터리 공장에 자금을 계속 투입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단독 공장이 늘어나면서 시장 변화에 따라 생산 라인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게 됐다. 파트너인 완성차 회사와 일일이 협의하지 않아도 돼 의사 결정도 더 빠르고 단순해졌다. 완성차 기업도 전기차 수요에 비해 배터리가 이미 공급 과잉인 상황이라, 배터리 투자를 줄이고 다른 사업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새로운 윈윈 모델인 셈이다.

◇ESS·로봇 등으로 다각화

북미에서 홀로서기에 나선 우리 배터리 기업들은 ‘전기차 올인’ 전략에서 탈피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AI(인공지능)와 로봇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삼성SDI는 전기차 배터리 대신 ESS(에너지저장장치) 중심으로 체질을 바꾸고 있다. ESS는 전력을 저장해두는 초대형 보조배터리다. AI 붐으로 전력 소모가 극심한 데이터센터가 늘어나면서, 정전을 막고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대형 ESS 수요가 급증하는 데 따른 대응이다. LG엔솔이나 SK온도 일부 북미 공장에서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 라인을 ESS용으로 전환하며 새로운 시장 공략에 한창이다.

AI 기술이 적용된 자율 로봇이 주목받으면서, 동력원인 로봇용 배터리 시장도 열리고 있다. 예컨대 삼성SDI는 지난 2월 현대차·기아와 ‘로봇 전용 배터리 공동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로봇 전용 고성능 배터리 개발에 나섰다.

한 발 더 나아가 기업들은 우주 산업 등에 사용될 차세대 배터리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LG엔솔은 우주 탐사 기업 스페이스X의 우주선에 탑재될 배터리를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온도 대전에 지난 9월 전고체 배터리 파일럿 플랜트를 준공하며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