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4대그룹을 중심으로 총수 다음으로 강력한 ‘수퍼 2인자’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과거 대기업에선 총수를 둘러싼 부회장단 등 CEO(최고경영자) 그룹의 집단 경영 체제가 흔했다. 재계 주요 인사가 마무리된 현재, 총수가 글로벌 네트워킹을 통해 ‘큰 그림’을 그리고 막강한 2인자가 전략·인사·재무 등 주요 기능을 쥔 채 ‘살림’을 하며 그를 보좌하는 간결한 구조가 대세로 떠올랐다.
삼성은 올해 새로 출범한 사업지원실장을 맡은 박학규 사장이, SK는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인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핵심 2인자 역할을 한다. 현대차그룹에선 지난 18일 조직 개편으로 장재훈 부회장이 그룹 담당 부회장으로 사실상 승격되며 역할이 커졌고, LG는 역시 올해 인사를 거치며 유일한 부회장으로 남은 권봉석 ㈜LG COO(최고운영책임자)가 구광모 회장을 보좌한다.
특히 대기업들은 올해 주력 시장인 미국에서 관세 장벽을 마주하게 됐고, 이제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가 된 중국 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강력한 2인자를 두는 구조는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총수에게 정제된 정보와 의견을 전달해 소통 속도를 빠르게 한다. 또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의 수를 최소화해 혼선을 줄이는 ‘실속형’ 시스템이기도 하다.
◇4대 그룹의 수퍼 2인자들
삼성은 지난 11월 정현호 부회장이 회장 보좌역으로 물러나고, 임시 조직이었던 사업지원TF가 8년 만에 사업지원실이란 정식 조직이 됐다. 서울 삼성 서초사옥에 자리 잡은 사업지원실은 그룹 주력인 삼성전자와 다른 전자 계열사의 전략·경영 진단·인사에 직접 관여한다. 지난달 삼성물산 산하의 계열사를 맡은 ‘EPC 경쟁력 강화 TF’도 서초사옥으로 이전했다. 이미 그 건물에 있던 금융 분야 TF까지 더해 사업지원실이 그룹 전반을 챙길 수 있는 구조다. 이재용 회장이 글로벌 기업인들을 만나며 사업 구상을 하고, 박 사장이 경영 전략이 제대로 실행되는지 내실을 챙기는 셈이다.
SK에선 최창원 의장이 최근 임기가 2년 더 연장되며 2인자 입지를 더 다지고 있다. 그는 지난 2년간 SK이노베이션과 SK E&S 합병 등 그룹 리밸런싱(사업 구조 조정)을 지휘했다. 최근엔 인사나 조직 개편 등을 더 적극 주문하며 주력인 SK하이닉스의 성장 DNA를 다른 계열사에 이식하는 방안 등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태원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까지 맡으며 대외 활동과 비전을 제시하는 반면, 최 의장은 내부 역량을 키우는 역할 분담이 자리잡았다.
현대차그룹도 장재훈 부회장이 지난 18일 그룹 인사에서 내연차와 미래차 R&D 조직, 대관 조직을 새로 관할하게 됐다. 산하에 담당 부문 사장만 5~6명이 있다. 현대차그룹은 자동차에서 로봇·AI(인공지능)·수소 등 미래 사업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장 부회장은 정의선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각 사업을 관리하며 협업을 유도하는 조정자 역할을 하게 될 전망이다.
구광모 LG 회장은 최근 수년간 ‘ABC(AI·바이오·클린테크)’ 등 미래 성장 동력 중심으로 그룹 체질 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권봉석 LG 부회장은 가전과 전장 등 LG 주력 사업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핵심 조언자다. 특히 소통 능력이 뛰어나 회장과 CEO들, 주요 계열사 간 의견 조율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 그룹 부작용도 줄인다
두산그룹의 경우에도 박정원 회장이 AI 중심으로 그룹 체질을 바꾸는 가운데, 동생인 박지원 부회장이 그룹 주력 계열사 두산에너빌리티를 이끌며 뒷받침하는 구조다. 한화그룹 역시 김승연 회장 장남 김동관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 핵심 사업인 방위산업·조선 등을 지휘하면서 김 회장의 리더십을 구현하는 중이다. HD현대 역시 지난 11월 인사에서 정기선 회장과 공동으로 HD현대 대표이사로 내정된 조영철 부회장이 2인자 역할을 한다. 재무 전문가인 그는 일선에서 물러난 권오갑 명예회장 자리를 채우는 역할을 하게 될 전망이다.
주요 기업에서 등장한 압도적인 2인자의 존재는, ‘측근 그룹’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각종 문제를 해소하는 역할도 한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 부회장단이나 사장단의 집단 경영 시스템은 다양한 의견을 도출할 수 있고, 자연스러운 경쟁을 유도한다는 게 장점이었지만, CEO들이 총수 뒤에서 각자의 왕국을 만들며 칸막이를 치는 경우도 많았다”며 “강력한 2인자의 존재는 이런 점을 예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