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품질 때문에 국산을 썼지만, 이젠 전기료 때문에 국산 단가가 너무 높아져 어쩔 수 없이 중국산을 씁니다. 당장은 싸게 먹히지만, 국내 업체들이 다 죽고 나면 중국이 부르는 게 값이 될까 봐 두렵습니다.”(중견 기계업체 구매 담당자)
산업용 전기요금 폭등이 뿌리산업을 고사시키면서, 한국 제조업 생태계의 허리가 끊어지고 있다. 그 빈틈을 중국산 부품이 메우면서 한국 산업 공급망이 중국에 ‘구조적으로 종속’되는 현상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경기도 시흥의 염색업체 A사는 기능성 원단에 색을 입히는 가공을 거쳐 이를 국내 주요 아웃도어 기업에 납품해 왔다. 하지만 최근 생존의 기로에 섰다.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 충격으로 공과금 비중이 매출의 40%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A사 관계자는 “중국산과 m당 1달러 차이가 나는데, 이는 원가 기준 50%나 비싼 수준”이라며 “전기료 등 고비용 구조를 버틸 재간이 없어 이미 상당 물량을 중국에 뺏겼다”고 말했다. A사는 차량용 카시트 등 산업 자재 염색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A사 같은 사례가 늘면서 시화염색단지는 1995년 출범 당시 32개 업체였으나 현재는 18개만 남았다.
뿌리기업의 원가 상승은 대기업·중견기업에도 전이된다. 첨단기계를 수출하는 B사는 최근 열처리를 맡기던 협력업체 3곳으로부터 “전기료가 2~3배 올라 단가를 올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글로벌 수주 경쟁에서 가격이 생명인 B사는 결국 중국산 부품 비중을 늘리기로 했다. B사 관계자는 “공급망 안정성을 위해 국산을 쓰고 싶지만, 원가 차이가 너무 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부품·소재를 공급하던 업체들이 하나둘 사라지면서, 대기업들은 대체재를 찾아 해외 조달을 늘릴 수밖에 없는 구조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한국 제조업 경쟁력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국내 뿌리 산업 생태계가 무너져 대체재가 없는 상황이 되면, 중국 업체들이 가격을 올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줘야 한다. 초기엔 저가 공세로 들어오지만, 시장 장악 후엔 ‘부르는 게 값’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요소수 사태처럼 중국 내 전력난이나 정치적 이슈로 중국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면, 부품을 조달하지 못한 한국 대기업의 생산 라인도 멈춰 서야 한다. 도면과 사양서를 중국 업체에 넘겨주며 생산을 의뢰하는 과정에서 국내 기술 노하우가 유출되고,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제조 역량만 키워주는 결과를 낳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장은 “뿌리 기업은 제조업 전체를 떠받치는 인프라”라며 “전기 요금으로 이 기반이 무너지면 대기업은 중국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고, 장기적으로 산업 경쟁력을 악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