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6일 밤 경북 고령 주물 산업 단지 내 한 공장에서 작업자가 용해로에서 쏟아져 나온 쇳물을 형틀에 붓기에 앞서 점검하고 있다. 이 단지에선 전기료가 싼 밤 10시~08시 대에 야간 조업을 늘리는 공장이 급격히 늘고 있다. 산업용 전기료가 폭등하면서 원가에서 전기료 비율이 인건비를 추월하는 기업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김동환 기자

지난달 6일 오후 8시를 넘긴 시각 경북 고령 주물산업단지. 2.5㎞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주물공장 수십 곳이 일제히 불을 밝히고 가동 중이었다. 한 공장에선 고철을 녹여 만든 섭씨 1600도의 쇳물이 흘러나오자 작업장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쇳물을 형틀에 붓는 작업은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인근의 또 다른 주물 업체 대욱케스트도 작업장 내 3개 용해로를 풀가동하며 밤을 지새웠다.

자동차·조선·엘리베이터용 부품을 생산하는 이 단지는 국내 주물 생산량의 35.2%(연 36만t)를 차지하는 전국 최대 주물 단지다. 대부분은 대기업의 2·3차 벤더인 중소기업이다. 이곳이 요즘 불야성을 이루는 건, 주문이 넘쳐서가 아니다. 미국발 관세 쇼크와 내수 둔화로 물량은 급감했다. 대욱케스트 문성배 대표도 “월 2000t 생산이 올해 1200t 수준으로 줄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철야 조업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감당할 수 없는 전기요금 탓이다. 주물 업계가 적용받는 전기 요금제는 겨울철 밤 10시~오전 8시 요금이 낮 피크 시간대보다 절반 가까이 저렴하다. 주물조합 관계자는 “능률 저하와 안전사고 위험, 주간 대비 1.7배나 비싼 야간 수당을 감수하면서도, 전기료가 상대적으로 싼 심야 조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 20% 수준이던 야간 조업 비율이 지금은 50%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성규

◇불량·산재 위험 알면서도 심야 조업 ‘고육책’

전기료 쇼크는 전기를 많이 쓰는 주물·표면 도금·단조 같은 뿌리 산업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고령 산단의 환한 불빛은 활황 신호가 아니라, 비용 폭탄을 피해 밤으로 내몰린 기업들의 생존 몸부림이었다. 한밤중 쏟아지는 졸음 속에 쇳물을 다루다 보니 불량률이 치솟고, 안전사고 위험도 덩달아 커진다. 업계 관계자는 “안전 관리자도 없이 밤샘 작업을 하는 곳이 부지기수”라며 “전기료가 사람 잡는 시한폭탄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주물업이나 표면 도금업 등에선 매출액의 20~30%가 전기 요금으로 소모된다며 비명이 터져 나오고, 코로나 팬데믹 이전 400개에 육박하던 조합원사가 현재 반 토막 난 곳도 있다.

최근 3년여간 산업용 전기 요금이 70% 가까이 폭등하면서, 이곳 공장들의 원가 구조가 무너졌다. 노병욱 대구경북주물조합 이사장은 “제조원가의 16~17%였던 전기료 비율이 21% 이상으로 뛰었다”며 “이젠 인건비보다 전기료가 많이 나간다는 업체가 늘고 있다”고 했다. 고령의 경우 조합 회원사 67곳이 1년에 내는 전기료만 1512억원, 업체당 평균 23억원 수준이다.

올빼미 조업으로도 전기료를 감당하기 힘들어 아예 낮 조업을 포기하려는 업체도 나왔다. 1998년 설립된 대욱케스트는 현재 주·야 2교대 24시간 체제를 내년부터 ‘야간 7일 단독 가동’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전기료 부담으로 올해 초 97명이던 직원 중 10명을 내보냈지만 올해 창사 27년 만에 첫 적자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래픽=김성규

◇물량 감소 이중고…조합원 수 급감

전기를 많이 쓰는 표면 도금, 금형, 단조 같은 다른 뿌리 산업도 어려운 처지다. 박평재 표면공업조합 이사장은 “화학약품이 담긴 수조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24시간 전기를 켜놔야 하는 도금업은 전기가 사실상 원자재”라며 “매출의 30% 가까이가 전기료로 나가는 기업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력 효율이 좋은 설비를 쓰고 약품 탱크 단열을 강화하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겨우 버티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전기를 상대적으로 덜 쓰는 단조 업계도 제조원가 대비 전기료 비율이 4~5%에서 7~10%로 뛰었다. 강동한 단조공업조합 이사장은 “주말엔 24시간 돌리고 평일엔 4~6시간 멈추며 버틴다”며 “전기료가 원가의 10%까지 차지하면 사업성이 흔들린다”고 했다.

위기는 숫자로 드러난다. 표면도금조합은 회원사가 2019년 372개에서 지난해 189개로 반토막 났다. 주물조합도 같은 기간 223곳에서 196곳으로 줄었고, 금형조합 역시 528곳에서 493곳으로 줄었다. 강동한 이사장은 “지난 5년 사이 단조 업계의 8%가 무너졌다”며 “전기료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7~8년 내 절반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지난 5월 하도급 중소기업 700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뿌리기업 81.4%는 제조 원가 중 전기료 비율이 10%를 넘었다. ‘전기료 인상이 부담된다’고 한 비율은 90.1%에 달했다. 영업이익 대비 전력비 비율도 41.7%에 달한다고 중기중앙회는 설명했다.

☞뿌리 산업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자동차·조선·배터리 등 최종 완제품의 토대가 되는 산업을 말한다. 쇠를 녹여 붓는 주물, 금속을 두드려 형태를 잡는 단조, 표면을 입히는 도금 등 6가지 기초 공정이 여기에 해당된다. 쇠를 녹이거나 열을 가하는 공정이 필수적이라 전기 사용량이 매우 많다. 이 때문에 영세한 중소기업임에도 대기업과 같은 비싼 요금제를 적용받고 있어 전기료 폭등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