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경북 포항시 포스텍의 박태준학술정보관 지하 3층의 제3 클러스터센터. 내부로 들어서자 마치 폭풍이 부는 것 같은 강풍과 소음이 기자를 압도했다. 도서관 서가처럼 촘촘하게 들어찬 서버랙(서버가 층층이 설치된 선반)이 뿜어내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거대한 냉방기가 쉴 새 없이 찬바람을 토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엔 포스텍 AI(인공지능) 연구의 심장부인 AI 특화 데이터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엔비디아의 H200 등 고성능 GPU가 포스텍과 외부의 연구자들을 위해 24시간 가동된다. 하지만 대학 관계자들은 이 웅장한 기계음이 ‘예산 타들어 가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했다. 고성능 AI 연산을 수행할수록 전력 계량기는 빠르게 돌아가고, 이는 곧 한정된 예산의 고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건물(학술정보관)의 전력 사용량은 5년 새 65% 늘었지만, 전기 요금 납부액은 5억3000만원에서 13억원으로 160% 폭등했다.
앞으로가 더 막막한 상황이다. 대부분 학과가 AI를 활용한 첨단 연구에 뛰어들면서,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텍 한 관계자는 “H200보다 더 강력한 엔비디아 B200 칩을 내년에 들여올 예정인데 성능도 기대되지만 전기 요금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GPU의 연산력이 좋아질수록, 전력 소모량과 발열량은 더 늘어나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연구 시설 짓누르는 ‘전기값’
전기료 쇼크로 인해 실제 국가 핵심 연구 시설이 멈춰 서는 일도 있었다. 포스텍 내에 있는 ‘포항 가속기 연구소(PAL)’ 얘기다. 건물 면적이 약 10만㎡에 달하는 포항 가속기 연구소는 태양광의 100경(京)배에 달하는 빛을 쏘아, 1나노미터(㎚·1㎚=10억분의 1m) 보다 작은 입자가 1000조 분의 1초 단위로 변화하는 순간까지 포착한다. 이 가속기는 미래 노벨상의 산실로 기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규모가 큰 만큼 전력 소모량도 커, 이 연구소 하나로만 지난해 전기 요금 184억5000만원이 나왔다.
이 가속기는 지난 2023년 10월, 한 달간 가동을 전면 중단해야 했다. 교육용 전기 요금이 가파르게 오르는 상황에서 빠듯한 예산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연구 스위치를 내리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것이다.
포스텍뿐 아니라 AI 연구에 나선 국내 주요 대학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전기 요금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에 빠졌다.
본지가 AI 대학원을 설립해 운영 중인 서울대, 카이스트, 포스텍의 지난해 전기 사용량과 요금을 집계했더니, 2020년 대비 사용량은 13.8% 늘었는데 요금은 574억원으로 6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서울대는 KT 데이터센터나 LG사이언스파크 같은 기업 시설을 제치고 서울 지역 ‘전기 요금 납부 1위’ 기관이 됐다. 등록금 동결로 대학 재정은 제자리걸음인데, 고정비인 전기료가 블랙홀처럼 예산을 빨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전력도 첨단 산업 연구 인프라”
교수 연구비로 전기료를 부담하는 사례도 나온다. 머신러닝을 연구하는 한 교수는 “전기요금으로 연 5000만원을 연구비에서 지출하는 탓에 연구실 조교수도 절반으로 줄였다”며 “AI 외 전력 부담이 덜한 컴퓨터 이론 등으로 분야를 틀어야 하나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서진욱 서울대 컴퓨터연구소장은 “연구비는 연구 조교를 채용하거나 국제 학술 대회 출전, 국제 연구 협력 등에 쓰여야 하는데 이를 전기료에 내면 연구 역량에 투자할 여력이 줄어든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AI와 반도체 등 전력 소모가 극심한 첨단 연구 분야는 현행 교육용 요금을 넘어선 획기적인 요금 체계 개편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미래 먹거리의 기반이 되는 연구용 요금을 신설해 농업용 요금 수준으로 저렴한 가격을 책정하거나 교육기관 전기 요금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전력은 대학 등 교육 시설에 교육용 전기 요금을 따로 매긴다. 교육용 전기 요금은 작년 기준 1kWh당 143원으로, 산업용(186원)보다는 낮다. 하지만 2020년 대비 5년 새 37.5% 오르면서 대학들이 감내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대학이 등록금을 거의 올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AI 관련 연구가 많아지면서 고정비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을 지낸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9일 국회 ‘인공지능 제정법’ 공청회에서 “정부가 ‘대학은 전기 요금을 공짜로 쓰라’는 결단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한 교수는 “엔비디아 GPU를 확보해 줘도 연구자들이 전기 요금 때문에 학교 눈치를 보느라 GPU를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며 “대학이 연구가 아닌 전기 요금 걱정하는 게 우리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종규 포스텍 부총장은 “등록금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사립대 입장에서 사용량 대비 급격히 증가하는 전기 요금은 큰 부담”이라며 “전기 요금도 연구 인프라인 시대가 된 만큼 연구용 요금제 신설, 지방 발전 시설 인근 교육·연구기관 요금 할인제 등 다양한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