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5년 동안 국내에 새로 지어질 데이터센터가 150곳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설들이 필요로 하는 전력 규모(9.4GW)는 현재 운영 중인 전국 데이터센터 규모의 약 4배에 달한다. 대형 원전 6~7기를 동시에 돌려야 감당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AI(인공지능)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하고 있지만, 전기 요금 부담을 완화할 제도적 장치는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이대로라면 폭증하는 데이터센터를 제대로 돌리기 어렵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데이터센터, 5년 내 4배 늘어
22일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실과 한국전력에 따르면, 지난 8월 현재 한전에 “전기를 쓰겠다”고 신청한 신규 데이터센터는 총 150곳에 달한다. 이들은 오는 2030년까지 전력 공급을 희망하고 있다. 이 시설들이 요청한 전력 용량은 약 9.36GW(기가와트)다. 현재 국내에서 운영 중인 데이터센터 161곳의 총용량(2.57GW)과 비교하면 약 3.6배에 이르는 막대한 양이다. 단순 계산으로도 지금보다 4배 가까운 전력 인프라가 5년 안에 갖춰져야 한다는 뜻이다. IT 업계 관계자는 “AI 시대의 필수 인프라인 데이터센터 수요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전기 요금 부담이 지금처럼 계속 커진다면 가동은커녕 신규 건설 투자 자체가 막힐 수 있다”고 말했다.
데이터센터는 산업용 전기 요금을 내는 제조업·광업 등과 달리 상가나 빌딩 등에 적용되는 일반용 전기 요금을 적용받는다. 문제는 일반용 요금이 산업용 못지않게 가파르게 오르면서 IT 산업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한전에 따르면, 일반용 전기 요금은 지난해 말 기준 ㎾h(킬로와트시)당 172.99원으로, 4년 전(128.47원)보다 35% 뛰었다. 24시간 서버를 가동하고 냉방 시설을 돌려야 하는 기업들엔 직격탄이다. 특히 AI 학습과 클라우드 서비스 등이 확대되며 갈수록 전력 사용량이 늘어나는 상황이라 인상된 전기 요금은 고스란히 운영 비용 부담이 되고 있다.
한 IT 기업 임원은 “AI 학습용 서버와 고성능 GPU(그래픽 처리 장치)가 꽉 들어찬 데이터센터는 일반 공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전력 소모가 극심하다”며 “전기 요금 리스크가 한국 첨단 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갉아먹는 새로운 부담으로 떠올랐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데이터센터 가동이 늘어난 카카오와 네이버는 2021~2023년 사이 전력 사용량이 각각 117%, 44% 폭증했다.
◇“李 정부 ‘AI 육성’과 엇박자”
정부가 ‘AI 육성’을 국정 과제로 내걸면서도 정작 핵심 비용인 전기 요금 문제엔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월 취임 직후 첫 지방 공식 일정으로 국내 최대 규모 데이터센터인 울산 AI 데이터센터 출범식에 참석했다. 대통령의 참석은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확장을 독려하는 메시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기업 현장의 전기 요금 부담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향후 IT 신산업 투자에도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업계와 학계에서는 “정부가 AI 진흥만 외칠 것이 아니라, 전기 요금 부담 체계에 대한 중장기적 계획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손양훈 인천대 명예교수는 “AI와 반도체 강국을 표방하는 한국이 전기 요금 체계를 정비하지 못한다면, 첨단 산업과 디지털 전환(DX) 전략 자체가 좌초할 수 있다”며 “한전이 아닌 다른 데서 전기를 사들이는 방안을 허용하는 등 데이터센터의 전기료 부담을 덜어줄 방안이 시급하다”고 했다.
◇인도, 데이터센터 전기료 40% 절감
한국이 머뭇거리는 사이 해외 경쟁국들은 파격적인 ‘전기료 당근’을 제시하며 데이터센터 유치전에 나섰다.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에 따르면, 인도 정부와 주(州) 당국은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전기료를 면제하거나 토지·건물 사용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마하라슈트라주 등 일부 지역에서는 데이터센터용 전기 요금을 약 40% 절감하는 조치도 시행 중이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도 지난달 데이터센터 밀집 지역인 카라칼팍스탄 자치공화국에 1억달러(약 1480억원) 이상 투자하는 기업에 전기료를 감면하겠다고 밝혔다. 전기 요금 감면 등 유치 경쟁이 글로벌 AI 시장의 핵심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도 데이터센터에 적용되는 전기 요금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전용 요금제’를 도입하거나, SMR(소형 모듈 원전) 등을 도입해 전력을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제언들이 나온다. 박종배 건국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미국의 일부 기업은 ESS(에너지 저장 장치)나 SMR 등을 통해 외부 전력망에 의존하지 않고 데이터센터를 자체적으로 가동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데이터센터 등 AI 산업이 한전의 전기 요금에 얽매이지 않도록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