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첨단 산업의 축을 제발 지켜주세요.”
지난 10월 전북 정읍시 제3산단 내 SK넥실리스 본사 회의실. 이학수 정읍시장이 회사 임원진을 만나 호소했다. 하지만 이 시장과 마주 앉은 임원들의 표정은 무거웠다. 국내 최대 동박(Copper Foil) 기업 SK넥실리스는 최근 한국이 아닌 말레이시아·폴란드 등 해외에 생산 라인을 신설해 왔다. 그런데 정읍에 있던 생산 설비 일부마저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전하겠다고 하자, 이 시장이 붙잡고 나선 것이다.
SK넥실리스 정읍 공장은 이 회사의 유일한 국내 공장으로, 정읍시 전체 전력의 절반을 써왔다. 수백 명을 고용하는 사실상 정읍의 유일한 대기업이다. 하지만 이 회사 역시 ‘전기료 폭탄’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동박 산업은 전기 분해(도금) 공정에 막대한 전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장치 산업이다. 머리카락 30분의 1 두께로 얇고 길게 뽑아내려면 24시간 고압의 전기를 일정하게 공급해야 한다. 동박 업계에서 ‘전기가 곧 원재료’라고 말하는 이유다. 산업용 전기료가 치솟자 SK넥실리스가 매달 내는 전기 요금만 50억원을 웃돈다. 전기료가 전체 생산비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이 됐다.
SK넥실리스 관계자는 “산업용 전기 요금 급등으로 해외보다 부담이 지나치게 커져, 국내 생산은 점점 더 버거워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와 글로벌 공급 과잉이 겹치면서 국내 인건비와 전기 요금 상승 타격을 감내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정읍 공장 내 기존 라인을 R&D(연구·개발) 기반의 ‘마더 팩토리’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이다.
◇“한국서 공장 돌릴 이유 사라진다”
전기료발(發) 오프쇼어링(생산 기지 해외 이전)은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기료는 기업의 공장 입지를 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특히 동박·유리·폴리실리콘처럼 전기 사용량이 많은 산업에서는 전기료가 원가의 30~40%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기료가 원인이 된 탈(脫)한국 러시는 이미 확산하고 있다.
태양광용 폴리실리콘을 만드는 OCI홀딩스는 말레이시아 현지 공장을 인수해 한국을 대체할 ‘제2 생산 기지’를 만들 기반을 마련했다. 폴리실리콘 제조의 핵심 공정에서는 금속 필라멘트를 수백 도 이상으로 달구고 고순도 가스를 붙여야 한다. 필라멘트를 고온으로 유지하는 데 막대한 전기가 사용된다. OCI홀딩스 관계자는 “원가의 40%가 전기료인데 말레이시아 전기료는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라며 “이 때문에 현지 발전사와 10년 치 전력을 직접 구매하는 계약까지 체결했다”고 했다. 지난 7월에는 약 6000억원을 투자해 2029년부터 가동할 반도체용 폴리실리콘 생산 기지도 첫 삽을 떴다.
유리 업계 사정도 다르지 않다. 원재료인 모래를 녹이는 과정이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공정이다. KCC글라스는 지난해 유리 81만t을 생산하고 전기료 693억원을 냈다. 2년 전보다 생산량은 8% 줄었는데, 전기료는 오히려 56%나 늘었다.
결국 지난해 국내 유리 업체 최초로 해외(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짓고, 판유리 생산을 시작했다. 판유리를 만드는 국내 공장 두 곳 중 하나인 여주 공장의 유휴 설비 일부를 인도네시아로 옮겨 첫 생산 라인을 완공한 것이다. KCC글라스 관계자는 “전기료가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라 현지 투자가 불가피했다”며 “첫 설비 가동이 안정화되면 동남아와 오세아니아 등지에 추가 공장도 신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동박 업체 롯데에너지머티리얼스는 이미 2019년 전기 요금이 한국보다 약 40% 저렴한 말레이시아로 생산 기지를 옮겨 가동 중이다. 현대제철은 2029년 상업 생산 개시 목표로 미국 루이지애나에 전기로(電氣爐) 제철소를 짓기로 했다. 이 결정에는 전기료가 한국보다 약 34% 낮은 점이 주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택용보다 비싸진 산업용 전기료
전문가들은 한국의 기형적인 요금 구조가 기업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한다. 통상 세계 각국은 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대량으로 전기를 쓰는 산업용 요금을 주택용보다 저렴하게 책정한다. 한국도 산업용 전기 요금이 주택용보다 낮았다. 그러나 지난 3년 반 동안 산업용만 대폭 올린 탓에 2023년부터는 산업용 전기료가 주택용 요금을 추월했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산업용 전기 요금은 ㎾h(킬로와트시)당 179.23원이고 주택용 요금은 155.52원이다.
한국보다 산업용 전기료 자체가 비싼 국가 대부분도 재생에너지 비율이 높은 유럽권이고, 이마저도 대부분은 산업용 전기 요금은 주택용 대비 90% 이하 수준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산업용이 주택용을 따라잡아 가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한 에너지 분야 교수는 “한국처럼 산업용 전기료가 주택용을 웃도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렵다”며 “산업 경쟁력의 기반 자체가 빠르게 약해져 기업들의 ‘오프쇼어링 러시’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