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사들의 해외 투자·생산 방식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호황으로 생산 시설이 부족할 경우 거액을 들여 해외 조선소를 인수하거나 신축했지만, 최근에는 현지 조선소에 일감을 주는 방식으로 협업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직접 투자에 따른 손실 위험을 줄이고 경기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 변화로 풀이된다.
21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최근 삼성중공업은 해외 조선소와의 협력을 강화해 수익성을 높이겠다는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기술력이 필요한 설계·조달·엔지니어링은 삼성이 맡고 생산은 해외 조선소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삼성중공업이 지난 10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수주한 원유 운반선 3척의 건조는 베트남 조선소에서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그리스 선사에서 수주한 선박도 중국 주산 조선소에서 싱가포르 팍스오션이 만든다. 미국에서는 비거마린그룹과 군수지원함 유지·보수·정비(MRO·Maintenance, Repair, Overhaul)에 대해, 콘래드 조선소와는 LNG 벙커링선 공동 건조 관련 협약을 맺었다.
인도에서 대규모 그린필드(생산시설) 투자를 진행 중인 HD한국조선해양도 현지 업체들과의 협업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위험을 줄이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은 인도 최대 국영 조선소인 코친조선소와 협력해 인도에 진출했다.
당시 협약에는 양 사가 기술 이전과 공동 수주에 나서고 인도를 세계 5위 조선·해운 강국으로 육성하도록 협력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와 함께 HD한국조선해양은 인도 국방부 산하 국영기업인 BEML과 ‘크레인 사업협력 확대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페루의 군함 건조 사업을 수주한 HD현대 역시 생산은 페루 국영 조선소인 시마조선소에 맡겼다. 지난 9월 운영을 시작한 HD현대의 필리핀 수빅조선소도 인수가 아닌 임대 방식을 택했다. HD현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IMI(International Maritime Industries) 조선소 건설 사업에도 참여했는데, 지분은 20%만 소유할 예정이다. 사업도 선박 직접 건조가 아닌 설계와 기술 컨설팅에 대한 로열티만 받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최근 조선사들이 직접 투자보다 현지 업체들과의 협업으로 해외 사업 방식을 바꾼 것은 과거 업계가 겪었던 실패가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과거 조선사들은 대규모 자금을 들여 해외에 조선소를 직접 건설하거나 현지 조선소를 인수했다.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은 1997년 루마니아 망갈리아 조선소를 인수했다. STX조선해양과 한진중공업(현 HJ중공업)은 각각 중국 대련과 필리핀 수빅에 조선소를 건설했다.
그러나 이들 업체의 대규모 투자는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로 끝났고, 이는 회사 전체적인 경영 위기로 번졌다. 해당 사업들은 글로벌 경기가 호황을 맞던 시기에 추진됐지만, 이후 금융 위기가 시작되고 조선업이 극심한 불황을 겪으면서 자금난이 가중됐던 것이다. 현지에서 숙련된 인력을 찾거나 각종 기자재를 조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점도 직접 투자의 실패 이유로 꼽혔다.
지난해 1억달러(약 1500억원)를 들여 미국 필리조선소를 인수한 한화오션의 경우 미국 정부의 강력한 조선업 재건 의지와 한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직접 투자를 결정한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우종훈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교수는 “최근 조선사들은 현지 조선소들에게 기술을 지원해 주고 투자 위험은 나누는 방식으로 해외에 진출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직접 투자를 하는 기업도 있고 협력을 통한 투자를 하는 곳도 있는데, 정부 차원에서 보면 조선업의 전략 포트폴리오가 잘 짜여져 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