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뉴시스] 이영환 기자 =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외환위기 이후 최대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16일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공항 환전소에 원·달러 환율 등이 표시되어 있다. 2025.12.16. 20hwan@newsis.com

고환율이 기업 경영을 옥죄는 가운데, 정부의 ‘환율 협조’ 요청이 기업들에 또 다른 압박이 되고 있다. 급등한 원자재 가격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에 더해, 기업들은 정책적 부담까지 짊어지게 된 모양새다.

지난 18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주요 대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달러 공급 협조’를 요청했다. 환율 안정을 위해 해외 매출 비중이 큰 기업들이 달러 보유량을 줄이고 이를 원화로 환전하는 등 외환 시장 안정에 동참해 달라는 취지다.

일부 기업만 이 회의에 참여했지만, 사실상 재계를 향한 메시지로 풀이됐다. 재계는 따르자니 부담이고, 안 따르자니 눈치가 보이는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고환율이 민생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자는 정부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환율을 반영해 세운 연(年) 단위 이상의 장기 사업 계획과 수익 구조를 단기간에 바꾸는 건 부담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기업의 경영 메커니즘이 정부의 요구처럼 단기간에 조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대기업들은 보통 환율 변동 손실을 막기 위해 미래 환율을 미리 고정하는 ‘환헤지’ 계약을 체결한다. 이미 확정된 환율 관련 사업 전략을 정부 요구에 맞춰 즉각 수정하는 것은 계약 위반이나 추가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환율을 낮추는 방향으로 행동하라는 요청은 사실상 가격, 결제 전략을 바꾸라는 의미인데, 이미 확정된 계약이 많아 즉각 대응은 어렵다”고 말했다. 환율 안정에 맞춰 기업 전략을 조정했다가 환율 흐름이 바뀌어 손해가 날 경우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는 우려도 나온다.

고환율이 수출 기업에 무조건 호재라는 인식도 현실과 괴리가 있다. 원자재·에너지 수입 가격이 상승하면서 ‘수출 보너스’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수출 산업인 조선업의 경우 핵심 자재인 후판 가격이 환율과 연동해 오르면서 고환율 수혜가 상쇄되는 구조다.

중소·중견기업의 사정은 더 팍팍하다. 대기업과 달리 환율 변동에 대응할 여력이 크지 않고, 환헤지 수단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빨대를 생산하는 중소기업 리앤비는 협력사가 내년 초 원자재 제지 가격을 15% 정도 올릴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회사 최광현 대표는 “영업 이익률이 한 자릿수인 처지에서 큰 타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