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의 미국 테네시주 제련소 건설 사업(미 제련소 사업)과 관련해 영풍은 “원칙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혔지만, 앞서 열린 이사회에서 영풍·MBK파트너스(영풍 측) 추천 이사들은 관련 안건에 전부 반대한 것으로 파악됐다. 투자 구조 등에서 경영권 분쟁에서 영풍 측에 불리하게 작용할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일단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19일 복수의 고려아연 사외이사에 따르면 지난 15일 열린 이사회에 참석한 김광일 MBK 부회장과 강성두 영풍 사장, 화상으로 참석한 장형진 영풍 고문, 권광석 사외이사 등 영풍·MBK(영풍 측) 추천 이사들은 고려아연의 미 제련소 사업과 관련된 안건 6개에 모두 반대표를 행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6개 안건은 ▲미국 정부 등으로부터의 투자 유치 및 미국 제련소 건설 등 사업 추진계획 승인의 건 ▲외국 합작법인 출자지분 취득 및 투자계약 체결 승인의 건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및 신주인수계약 체결 승인의 건 ▲현지법인 출자 미 미국 제련소 인수 승인의 건 ▲현지법인에 대한 보증 제공 승인의 건 ▲결산배당(안) 및 배당기준일 확정의 건 등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외이사는 “영풍 측 사외이사 중 한 명은 이사회에서 ‘인허가가 지연될 수 있고, 원료 공급·판매 이슈도 있다. 미국 정권 변화 이슈까지 모두 다 리스크’라고 말했다”면서 “영풍 측 사외이사들은 관련 안건 모두 반대표를 행사했다”고 했다.
또 다른 사외이사는 “영풍 측 인사는 ‘미국 정부가 여러 위험에 대해 어떤 리스크를, 어떻게 테이킹하는지 설명하라’고 발언했다”면서 “미 제련소 사업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주장했다.
이는 영풍이 이사회 하루 뒤인 16일 “미국 제련소에 원칙적 찬성”이라는 입장을 낸 것과는 다소 다른 반응이다. 영풍은 당일 입장문에서 “핵심 광물과 공급망 안정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한·미 간 전략적 파트너십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영풍은 원칙적으로 찬성한다. 고려아연이 보유한 기술력과 경험이 미국 내 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앞서 고려아연은 미국 상무부·전쟁부(옛 국방부) 및 방산전략기업 등과 크루서블메탈즈(CrucibleMetals,LLC)라는 합작법인(JV)을 설립해 미 테네시주 클락스빌(Clarksville)에 비철금속 제련소를 건설하기로 했다고 지난 15일 밝혔다.
고려아연은 자금 조달 방법 중 하나로 미 전쟁부가 최대주주(40.1%)로 있는 JV에 고려아연 지분 약 10.59%를 제3자 배정 유상증자하기로 했다. 또 미국 전쟁부와 대출 계약을 맺으면서 현지 제련소 운영법인이 전쟁부를 상대로 신주인수권(워런트)을 발행해 제련소 지분 34.5%를 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알려졌다.
이에 고려아연과 경영권 분쟁 중인 영풍 측은 즉각 반발하면서 내년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최대주주인 영풍 측의 지분율(44.25→약 40%)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최 회장 측(약 32→39%)에 우호적인 의결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작용했다고 밝혔다.
영풍 측은 또 고려아연 이사회에서 결의한 유상증자에 대해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신주 발행 금지 가처분(가처분)을 신청했다. 영풍 측은 “경영권 분쟁 상황에서 최윤범 회장의 지배력 유지를 목적으로 설계된 신주배정은 상법과 대법원 판례가 엄격히 금지하는 행위”라고 했다.
이어 “가처분의 취지는 미국과의 협력을 막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라면서 “오히려 절차적 정당성과 지배 구조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적 조치로, 특정 개인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회사의 자본 구조와 주주 가치가 훼손되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사회에서도 영풍 측 이사진 1인은 미국에 제련소를 건설하는 것은 긍정적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럼에도 건설 계획 자체를 논의하는 안건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는 “6건의 안건이 실질적으로 하나의 안건이기 때문에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반대하는 이상 다른 안건도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현지에서는 이 같은 상황이 미 제련소 사업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이다. 전날(현지 시각) 로이터(Reuters)는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내 아연 제련소 건설을 결정하면서, 이 프로젝트는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복잡한 인수·경영권 분쟁 중 하나에 휘말리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사외이사는 영풍 측 이사가 비밀준수 조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영풍 측 이사 1명이 미국 정부를 비롯해 다자간 계약의 세부 내용이 담긴 수십 장의 이사회 자료를 회의장 밖으로 가져나갔고, 이를 외부로 유출한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상법상 ‘이사의 비밀유지의무’ 위반 사항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논리다.
상법 제382조 4항에는 ‘이사는 재임 중 뿐만 아니라 퇴임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회사의 영업상 비밀을 누설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시돼 있다. 법조계에서는 이사회 자료를 반출한 것보다는 자료의 내용을 외부에 전했는지가 중요한 쟁점이라고 보고 있다.
고려아연은 전날 공식자료를 통해 “이번 프로젝트는 참여자 다수 상대방이 있는 프로젝트로, 참여자들의 의견과 조건, 미국 법 및 정부 규정 등까지 고려해 진행되는 사안”이라면서 “MBK파트너스와 영풍은 (이번 프로젝트를) 고려아연 단독의 일방적 결정과 주도성을 가지고 진행하는 사업으로 왜곡하며 허위, 왜곡 사실을 지속 전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고려아연 이사회 앞두고 미 제련소 건설에 대한 사전 설명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고려아연은 이사회 당일과는 별도로 이틀에 걸쳐 4시간 이상씩 안건 설명회와 질의응답을 진행했고, 이사회에서도 7시간 동안 외국인 이사를 포함해 이사 전원과 공증인이 참석해 80페이지 분량의 자료를 보고하고 질의응답이 있었다고 했다.
반면 영풍 측은 고려아연이 이사회 일시를 월요일(15일) 오전 7시 30분으로 정해 놓고, 직전 금요일(12일) 오후 5시가 넘어 소집 통보하면서 이사회 구성원에게 핵심 자료를 사전에 제공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해외 제련소 투자, 합작법인 출자,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등 회사의 지배구조, 중장기 재무구조 및 투자계획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 한꺼번에 결의됐음에도 이사회가 충분한 검토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고도 했다.
한편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수석부장판사 김상훈)는 오는 이날 가처분 심문을 진행한다. 유상증자 대금 납입일이 오는 26일로, 법원이 심문 기일 일정을 신속하게 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처분의 최종 결론도 이 유증 일정에 맞춰 나올 예정이다. 고려아연은 가처분 대리인으로 김·장 법률사무소를, 영풍 측은 세종과 태평양 변호사들을 선임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