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과 관세 협상을 거치며 3500억달러(약 516조원) 대미 투자라는 난제를 짊어진 재계에 또 하나의 무거운 과제가 떨어졌습니다. 이번엔 ‘지역 투자’입니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정부·여당이 ‘탈(脫)수도권’ ‘지역 균형 발전’을 한목소리로 외치며 기업들을 압박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일 이재명 대통령이 ‘반도체 세계 2강’ 비전을 발표한 자리에서도, 정작 기업들의 관심은 정부의 지역 투자 요구에 쏠렸습니다. 정부는 반도체 기업들의 숙원인 ‘R&D 주 52시간 예외’ 적용을 지방 클러스터 근무자로 한정하겠다는 방침을 시사했습니다. 이 대통령도 삼성과 SK의 반도체 수장에게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눈길을 돌려서 그 지역에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튿날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 출범식에서도 정부는 “자금의 40% 이상을 지역에 분배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급기야 16일엔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총출동해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을 비롯한 주요 그룹 관계자들과 ‘지역 발전 해법’을 주제로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정 대표는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해선 기업이 어디에 가서 어떻게 공장을 짓고 활동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업의 입지 선정에 개입하겠다는 뉘앙스입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인재나 인프라 문제 해결 없이 투자부터 하라거나 수도권에 예정된 설비를 이전하라는 식의 접근은 정말 현실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는 “정권 초기인 데다 선거까지 맞물려 있어, 숙제 검사받는 심정으로 고민해야 하는 처지”라고 했습니다.
‘지역 균형 발전’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미 수백조 원대 대미 투자 부담과 각종 규제 리스크를 떠안은 기업들에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투자’까지 강요하는 건 도가 지나칩니다. 시장 논리가 아닌 정치 셈법으로 집행된 투자가 훗날 우리 경제에 어떤 부실 청구서로 돌아올지, 정부·여당은 냉철하게 자문해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