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의 간판인 현대차가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사장의 70% 이상을 외국인으로 채우는 파격 인사로 리더십의 근간을 바꾸고 있다. 한국인 순혈주의를 깨는 파격 인사를 통해 ‘한국 기업’이 아닌 ‘한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으로의 획기적 변화에 나선 것이다.
현대차 최신 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차는 스페인계 미국인인 호세 무뇨스 CEO를 포함해 총 7명의 사장 중 외국인이 4명이었다. 그런데 곧 단행될 사장단 인사를 앞두고 한국인 사장 2명이 퇴임하고, 그중 빈 자리인 R&D(연구개발) 본부장에 독일인이 내정됐다. 사장 7명 중 최소 5명 이상이 외국인으로 구성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국적도 미국, 독일, 벨기에 등으로 다양하다.
재계에선 현대차가 R&D 조직의 수장까지 외국인으로 교체한 것을 놀랍게 받아들이고 있다. 내부 출신 토종 연구자가 수장이 되던 관행을 한번에 깬 것이다. 현대차 새 R&D본부장에 내정된 만프레드 하러는 포르셰에서 전기차 개발을, 애플에서 애플카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외국인 수장을 중심으로 현대차 R&D 조직의 폐쇄성을 깨고 하드웨어(HW)와 소프트웨어(SW)의 화학적 결합을 이뤄내겠다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의지로 풀이된다.
◇CEO·이사회 확산하는 외국인
재계가 주목하는 건 숫자상의 변화가 아니다. 외국인 리더십이 가져온 조직 내부의 ‘화학적 변화’다. 지난해 창사 57년 만에 첫 외국인 CEO로 선임된 호세 무뇨스 사장의 등장은 상징적인 사건을 넘어 실질적인 ‘기강 확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 내부에서는 무뇨스 체제 이후 해외 법인, 특히 현지 채용 직원들의 근무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는 “과거 해외 법인에서는 ‘오후 5시 칼퇴근’이 불문율이었고 본사와의 시차를 고려한 심야·새벽 화상회의는 언감생심이었다”며 “하지만 글로벌 비즈니스 생리에 정통한 무뇨스 CEO가 부임한 이후, 현지 사정을 핑계로 한 느슨한 업무 관행이 설 자리를 잃고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인 주재원이 통제하기 힘들었던 ‘현지 문화’의 장벽을 외국인 리더가 뚫어내고 있는 셈이다.
한화그룹도 K-순혈주의 타파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핵심 사업부인 조선, 방산 수장에 잇따라 외국인을 선임하며 DNA를 바꾸고 있다. 한화는 작년 말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표이사 사장에 미국인 마이클 쿨터를 영입한 데 이어, 올 8월 인사에서도 에너지 장비 계열사인 한화파워시스템에 미국인 라피 발타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신임 CEO로 발탁했다. 한화오션도 지난해 4월 프랑스 국적의 필립 레비 사장을 핵심 사업부인 해양사업부장으로 영입했고, 올 3월엔 정기 주총에서 사내이사로 선임했다. 레비 사장은 올 상반기 8억2600만원의 보수를 받으면서, 김희철 CEO(5억6400만원)보다 2억원 이상 보수를 더 많이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 문화와 충돌’ 신중론도
외국인 고위 임원의 확산은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들의 핵심 전장은 미국”이라면서 “미국의 현지 법규와 문화, 공급망을 뼛속까지 이해하는 리더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했다. 또 한국 기업들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이제 ‘한국 기업’이란 꼬리표 대신 ‘외국에 공장 짓고, 외국인이 운영하는 현지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외파 출신 오너 3세들이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변화를 가속화하는 ‘메기 효과’를 꾀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학연, 지연 등에서 벗어나 과감한 구조조정과 혁신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삼성, LG 등 다른 그룹들은 인공지능(AI)이나 디자인, 마케팅, 대관(對官) 등 일부 조직에 외국인을 배치하는 실리적 접근을 하고있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가전 등을 담당하는 DX부문 최고디자인책임자(CDO)에 이탈리아 국적 마우로 포르치니를 영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외국인 경영자에 대한 신중론도 여전하다. 일례로 LG전자는 2000년대 후반 C레벨 임원 8명 중 6명을 외국인으로 채우는 실험을 했다가, 스마트폰 대응 실패와 조직 내부의 소통 단절 등을 경험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