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의 미국 제련소 건설은 미국 국무부가 지난 11일 발표한 ‘팍스 실리카(Pax Silica)’ 이니셔티브와 궤를 같이한다. 희토류를 포함한 핵심 광물, 첨단 제조, 반도체, 인공지능(AI) 인프라 등 분야에서 중국을 배제한 안전한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한국·일본을 비롯한 미국 우방 8국이 참여하는 블록화를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수조원이 투입될 것으로 보이는 미국 현지 제련소가 완공되면, 고려아연은 최근 지분을 인수한 캐나다 해저 자원 기업 TMC(The Metals Company)와 연계해 ‘북미 채굴-현지 제련-미국 방산 업계 공급’으로 이어지는 탈중국 밸류체인을 완성할 수 있을 전망이다.

그래픽=백형선

앞서 고려아연은 군수·방위 산업에 필수적인 전략 광물 안티모니를 재가공해 올해부터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안티모니는 미국의 대중 수입 의존도가 70%가 넘는다. 최근에는 미국 방위산업체 록히드마틴에 또 다른 전략 광물인 게르마늄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8월 이재명 대통령의 방미 경제사절단에 고려아연이 포함돼 록히드마틴과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아연은 최윤범 회장이 지난 10월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기간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주최한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도 참여하는 등, 미국 진출을 위한 협의를 진행해왔다.

◇中 장악 맞서는 전략 광물 생산 가능

고려아연은 중국의 수출 규제 1호 품목인 갈륨 신규 생산에도 나섰다. 갈륨은 반도체와 LED, 고속 집적회로 등 첨단 산업의 핵심 소재다. 고려아연은 2027년 12월까지 약 557억원을 투자해 온산제련소에 갈륨 회수 공정을 신설한다는 계획이다. 안티모니, 게르마늄에 이어 또 하나의 전략 광물 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셈이다.

고려아연은 1996년 미국의 노후 제련소를 5200만달러에 인수했다가 사업 부진으로 2000년대 초반 매각하고 철수한 경험이 있다. 채산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미국 제련소 투자는 현지 제련소를 다시 인수하거나 새로 짓는 데 최소 1조원 이상 자금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미국 진출 때와 달리 이번에는 미 정부, 주요 기업과 든든한 협력 관계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신규 제련소는 현재 세계 최대 제련소인 고려아연 울산 온산제련소보다 규모는 작지만, 전략 광물 위주로 생산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美 ‘공급망 동맹’ 전폭 지원 기대

고려아연에 대한 미 국방부의 지분 참여가 확정될 경우, 고려아연과 MBK파트너스·영풍 간의 경영권 분쟁에도 중대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 국방부가 고려아연 주주로 등재되는 순간, 지분 규모와 무관하게 고려아연은 단순한 사기업을 넘어 ‘미국의 안보 자산’으로도 분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주주로 있는 기업을 상대로 적대적 M&A(인수합병)를 시도하는 것은 외교적 마찰을 초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미국 내 사업 허가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리스크도 커진다. ‘국가 기간산업 보호’라는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의 명분에 동맹 차원의 자원 안보라는 날개까지 달리면서,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연금과 소액주주들의 표심이 현 경영진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점쳐진다.

다만, 미국 정부의 자본 참여는 동맹 강화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핵심 제련 기술의 이전이라는 잠재적 리스크를 동반한다. 이는 개별 기업의 협상력만으로는 방어에 한계가 명확한 사안이다. 따라서 정부 차원에서 제련 기술을 국가 핵심 전략 기술로 관리하고,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법적·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해 기업의 협상력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