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대통령실

정부는 10일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를 열고 ‘반도체 세계 2강 도약’이란 비전을 제시하며 국가 차원의 총력전을 선언했다. 정부는 이날 출범한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와 연계해 2047년까지 700조원 이상의 천문학적 투자 계획도 발표했다. 국가 대항전 성격의 ‘쩐의 전쟁’으로 치닫는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낙오할 수 없다는 절박감을 담은 청사진이다.

이 대통령이 이날 직접 나선 것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개별 기업의 역량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한 구조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현재 반도체 시장은 ‘1강(미국)-2중(한국·대만)’ 구도다. 미국은 원천 기술과 설계를 장악했고, 대만(파운드리)과 한국(메모리)이 뒤를 쫓고 있다. 정부는 메모리 분야 초격차를 유지하되, 취약한 팹리스(설계)와 파운드리 경쟁력을 끌어올려 확고한 글로벌 2강으로 올라서겠다는 목표다.

/그래픽=양진경

이 대통령은 반도체 투자 확대를 위해 금산 분리(금융 자본과 산업 자본의 분리) 원칙을 완화하는 방안도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금산 분리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 중이며 거의 준비가 됐다”고 했다.

◇李 “금산분리 완화 준비됐다”… 52시간 예외·원전 확대는 언급 안해

정부가 국민성장펀드 출범에 맞춰, 700조원 이상의 대규모 투자와 반도체 산업 육성 계획을 밝힌 것은 이제 국가 차원의 대응이 필수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날 참석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기업 CEO(최고경영자)들도 “AI 확산으로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 부담을 기업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샘 올트먼 오픈AI 창업자가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위해 삼성·SK에 요구한 HBM(고대역폭 메모리) 물량만 월 90만장(웨이퍼 기준)이다. 이는 양사 생산 능력의 두 배가 넘는 수치로, 이 물량 대응에만 최소 50조원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게 업계 추산이다.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 대만 TSMC는 미국 반도체 공장에 약 243조원을 투자할 계획이고, 미국 인텔도 유럽에 137조원을 쏟아붓기로 하는 등 수백조 단위 투자가 잇따라 집행되는 상황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참석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2047년까지 700조원 이상을 투자해 첨단 반도체 공장 10기(基)를 짓고, 팹리스(fabless·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생태계를 지금의 10배로 키워 글로벌 반도체 2강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연합뉴스

◇”금산 분리 완화, 거의 준비”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경기도 용인에 첨단 반도체 공장 총 10기를 짓기로 하고, 대규모 부지를 확보해 놓은 상태다. SK하이닉스의 경우 반도체 공장 4기 등 반도체 클러스터에 당초 120조원 투자를 예상했지만 용적률 상향과 최첨단 설비 비용 증가, 물가 상승 등의 영향으로 현재는 그 5배인 600조원을 투입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대규모 투자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 대통령은 ‘금산 분리’ 완화 방침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한참 전 투자 자금 문제를 언급했는데 일리가 있었다”며 “금산 분리 원칙은 독점 폐해를 막기 위한 것이지만,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첨단 산업 분야에서는 자칫 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에 입장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통일교 측이 여야 정치인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여야 관계 없이, 지위고하와 관계없이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산업 자본인 대기업이 은행 등을 갖지 못하게 하는 금산 분리는 여러 법률에 규정돼 있다. 이와 별도로 재벌 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기 위해 지주회사의 손자회사가 계열사(증손회사)를 두려면 지분 100%를 가져야 하는 규제도 있다. 손자 회사인 SK하이닉스는 이에 모두 해당되며, 금융 계열사를 두어 외부 투자를 받는 게 금지돼 있다.

이에 정부는 증손 회사의 지분 보유를 50%로 완화하는 방안을 곧 발표할 예정이다. 금융 리스 보유도 허용한다. 그러면 SK하이닉스가 50% 지분으로 ‘금융 리스(공장 설비 대여)’ 계열사(SPC)를 두고, 계열사로부터 공장을 빌려 쓸 수 있다. 나머지 지분 50%는 150조원 규모로 조성되는 국민성장 펀드가 참여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 펀드는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K엔비디아’ 모델을 구체화한 것으로, 이 중 50조원을 AI와 반도체에 집중 투입하고 엔비디아처럼 크게 성공하는 기업이 나오면 그 과실을 세금 부담 경감 등의 형태로 공유한다는 구상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세계 2강 목표에 모든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2047년까지 700조원 이상을 투자해 첨단 반도체 공장 10기를 짓고, 현재 세계 점유율 1% 수준인 팹리스(fabless·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생태계를 10배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민관이 함께 ‘상생 파운드리’를 구축해 중견 팹리스들이 적은 비용으로 반도체를 생산, 검증할 수 있게 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지방 투자해야 ’주 52시간제 예외’

하지만 정부의 이날 발표에선 반도체 업계의 숙원인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과 반도체 공장 운영에 필수적인 원전 확대 등은 빠졌다. 대신 정부는 광주·부산·구미 등 ‘남부권 반도체 혁신 벨트’ 구축을 발표하면서 반도체 업계에 ‘탈(脫)수도권’을 독려했다. 향후 반도체 등 첨단 산업 특화 단지를 비수도권에 한해 신규 지정하고, 지방 반도체 클러스터 근무자에겐 유연한 노동시간 적용, 투자 지원금 확대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비수도권 투자 시 주 52시간제 예외를 주는 방안 등을 추진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도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눈길을 돌려서 그 지역에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재계에선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투자와 지원 계획을 환영한다”면서도 “주 52시간제 예외 같은 현안을 지방 투자라는 정치적 요구와 결부시킨 것은 아쉽다”는 반응이 나왔다. “연구원들이 밤을 새워서라도 개발에 매진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절박한 호소를, 정부가 지방 표심(票心)을 의식한 지역 균형 발전의 지렛대로만 쓰려 한다는 지적이다. 지금도 경기 판교 이남에서는 석·박사급 인재 구인난이 심각한데, 지방에 공장을 지으면 인력 수급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호소다.

☞팹리스(fabless)

반도체 생산 설비 없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 이 설계도를 토대로 대만 TSMC, 삼성전자 같은 파운드리(foundry·위탁 생산기업)에 생산을 맡긴다. 칩을 독자 설계하는 애플·구글 같은 빅테크도 일종의 팹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