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원자력발전을 ‘유연성 전원’으로 전환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전력 공급 구조에 또 다른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유연성 전원은 전력의 수요와 공급 변화에 따라 필요할 때마다 발전량(출력)을 쉽고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전력원이다.

이같은 정책의 배경에는 석탄 화력 발전 퇴출과 재생에너지 확대가 있다. 문제는 전기요금이다. 재생에너지 등 상대적으로 발전단가가 비싼 전력을 우선 구매하고 값이 싼 원자력으로 만든 전력을 유연성 전원으로 활용할 경우 전기요금을 올려야할 가능성이 크다. 자연히 한국전력의 수익성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지난 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하여 발언하고 있다. / 뉴스1

8일 정부에 따르면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전력 수요가 낮은) 봄과 가을철에 재생에너지와 원전만으로 전력 수요를 맞출 수 있는 때가 곧 온다”며 “원전의 경직성을 최소화하고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개발(R&D)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경직성 전원은 기술적으로 발전 출력을 자유롭게 조절하기 어렵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마음대로 껐다 켰다 하기 힘든 전력원을 말한다. 원전은 건설비는 비싸지만, 원료비는 저렴하고 대규모 발전이 가능하기에 상시 운영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이에 원전은 현재 경직성 전원으로 분류된다. 석탄화력은 경직성 전원에 속하나, 원전만큼 경직성이 강하지는 않아 세부적으로는 중경직성 전원으로 불린다.

태양광·풍력과 같은 재생에너지도 사람이 아닌 날씨가 출력을 조절하기에 경직성 전원이다. 반대로 전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출력을 빠르게 올렸다가 내렸다 할 수 있는 전원은 유연성 전원이다. 액화천연가스(LNG) 발전, 양수발전, 에너지저장장치(ESS)가 유연성 전원에 해당한다.

◇ 원전 출력 속도 향상, 재생에너지 간헐성 막는데 쓰일 듯

원전 출력과 출력 속도를 제어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현재 한수원은 전력거래소의 요청이 있을 때 시간당 3%포인트(P) 속도로 출력을 줄인 다음 원전 운전량을 80%로 맞추는 출력 제어를 하고 있다.

만약 ‘4일 오후 2시부터 3시간 동안 80%만 운전하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원전은 오전 7시부터 6~7시간 동안 출력을 3%P씩 줄여 출력을 80%로 만들고 오후 2시부터 원전을 80%만 가동한다. 원전 특성상 출력을 갑자기 줄일 수도, 늘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수원은 출력을 낮추고 높이는 속도를 빠르게 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한수원은 지난 7월 말 ‘원전 탄력 운전 기술 개발’ 사업에 착수했다. 단기적으로는 1년에 100일 내외로 출력을 70%까지 줄이고, 중장기적으로는 1년에 100일 이상 출력을 50%까지 낮출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 원전 출력을 현재 시간당 3%P에서 향후 시간당 10%P씩 줄일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 원전 2호기. / 뉴스1

원전 출력 관련 기술을 향상해 출력 제어 대응력을 높이겠다는 배경에는 재생에너지 확대가 있다. 태양광만 놓고 보면 봄·가을철에는 일조량이 풍부해 태양광 발전량이 늘어난다. 하지만 봄·가을에는 냉난방기 수요가 없어 전력 수요가 적다. 이 때문에 태양광 발전이 늘어난 만큼 다른 발전원이 발전량을 줄여야 한다. 반대로 일몰 후에는 태양광 발전이 이뤄질 수 없어, 부족한 발전량을 채워야 한다.

태양광 발전량에 따라 다른 전력원이 발전량을 조정해야 하는 것은 공급(발전량)과 수요(사용량)가 일치해야 전력 계통 안정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전기 공급과 수요가 맞지 않으면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이 발생한다. 여름·겨울에 전력 수요가 폭증해 전기가 부족할 때도, 반대로 만들어진 전기보다 수요가 부족한 봄·가을에도 전력 공급과 수요를 맞추지 못하면 블랙아웃이 발생한다.

◇ 올해 11월까지 원전 출력 제어 27회, 지난해 3배 이상

지금까지 원전은 석탄 화력 발전과 함께 기저 전원을 담당했다. 하루 24시간 계속 돌아가면서 일 년 내내 유지되는 최소한의 전력 수요, ‘기저 부하’ 공급을 담당했다는 뜻이다. 원전 원료인 우라늄, 석탄 화력 발전 원료인 석탄 가격이 타 발전원보다 저렴하고 안정적이면서 대용량 발전이 가능하다는 점이 작용했다.

산업통상부가 지난 5월 발표한 ’2024년 에너지 수급 동향’을 보면 지난해 원전 발전량은 188.8테라와트시(TWh)로 국내 전체 발전량 가운데 31.7%를 차지했다. 이전까지 최대 발전원이었던 석탄의 지난해 발전량은 167.2TWh로 전체 발전량의 28.1%를 기록했다. 원전과 석탄이 전체 발전량의 59.8%를 담당했다.

LNG 발전은 3위로 전체 발전량의 28.1%(167.2TWh)를 기록했다. 태양광·풍력과 같은 재생에너지에 수소·연료전지와 같은 신에너지원을 포함한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10.6%로 처음 10%대를 돌파했다. 발전량은 63.2TWh였다.

발전원별 발전 비중 변화. 정부 조직 개편 전인 지난 5월 산업통상자원부가 제공한 자료다. 현재는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담당한다. / 산업통상부 제공

정부가 계획한 대로 원전이 재생에너지를 보완할 유연성 전원으로 역할을 하게 되면 원전의 출력 제어 횟수가 증가하고 발전량이 들쭉날쭉해지면서 기저 전원 역할을 담당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이미 원전의 출력 제한 건수는 올해 들어 급증했다.

한수원에 따르면 2020년 2회에 불과했던 출력 제한 건수는 2021년 3회, 2022년 4회, 2023년 7회, 2024년 7회였다가 올해 1~11월 사이 27회(복수 원전 동시 출력 제어는 1회로 집계)로 늘었다. 출력 제어로 감소한 원전의 전기 생산량은 2020년 1.2기가와트(GW) 수준이었다가 올해 들어 19.5GW로 폭증, 지난해(3.4GW)보다 5.7배 늘었다.

원전 출력 제어 횟수가 올해 들어 폭증한 것은 재생에너지 확대 여파다. 올해 1~11월 사이 출력 제한을 가장 많이 한 원전은 전남 영광에 있는 한빛 원전(26회)이다. 경북 울진에 있는 한울 원전은 11회, 부산과 울산에 있는 고리원전·새울원전은 각각 13회, 경북 경주에 있는 월성 원전은 10회에 걸쳐 출력을 제한하는 데 그쳤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한빛 원전에서 출력 제어가 가장 많았다는 건 태양광 발전이 많은 호남 지역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 한전, 발전 단가 비싼 재생에너지부터 사야…전기요금 인상 없으면 재무 건전성 위협

원전 출력 조정이 자주 이뤄지면 가장 저렴한 전력원이라는 원전의 장점이 사라진다.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10월 기준 원전의 발전단가(발전사에 지급된 돈을 전력량으로 나눈 값)는 킬로와트시(kWh)당 62.5원으로 가장 저렴하다. 석탄 발전단가는 kWh당 118.5원으로 원전 다음으로 저렴하다. 태양광은 kWh당 131.6원, 풍력은 kWh당 121.1원으로 원전과 석탄에 비해 발전 단가가 비싸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가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 장관은 “전기요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국제유가”라며 “발전 단가를 다른 나라의 풍력이나 태양광처럼 빨리 낮춰야 하는 것도 숙제다. 전기요금을 인상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재생에너지 물량을 늘려 가격을 낮추겠다”고 말했다.

발전단가가 비싼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느는 상황에서 전기요금은 인상하지 않을 경우 한전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국내 유일의 전기 판매 사업자인 한전은 전기사업법에 따라 신재생에너지로 발전한 전기를 우선 구매해야 한다. 발전단가와 무관하게 태양광·풍력으로 만든 전기를 먼저 전력 계통에 붙이고, 나머지 전력을 원전·석탄·LNG로 메우는 식이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전기요금은 올리지 않고 발전단가가 높은 재생에너지 구매 비중이 높이라고 하면 한전으로선 난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복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은 “한국은 원전이 전력의 30% 이상을 담당하면서 기저 전원으로 사용되고 있었기에 재생에너지가 확대되기 전까지는 출력을 제어할 이유가 없었다”며 “발전 단가가 싼 원전을 우선 사용해야 하는데 재생에너지를 위해 원전 출력을 줄인다는 건 경제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 역시 “원전을 유연성 전원으로 전환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원전 안전과 경제적 문제를 고려하면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라면서 “석탄 발전도 2040년까지 폐쇄한다고 하는 등 기저 전원 비중을 줄이는 것은 향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