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주요 그룹의 올해 연말 인사는 ‘생존’과 ‘실용’이라는 두 키워드로 요약된다. 기업들은 대외적으로는 역대 최고 수준의 채용과 투자를 약속했지만, 일제히 임원 대규모 감축과 부회장단 해체, 옥상옥 구조의 축소·통합에 나섰다. 미국발(發) 관세 폭탄과 대미 투자 압박, 상법 개정안과 노란봉투법 등 규제 리스크까지 겹친 복합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인사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올해 주요 그룹 인사 자료에는 ‘용퇴(勇退)’라는 표현이 유독 자주 등장했다. 삼성, LG, 롯데 등에선 부회장급 간판 경영진조차 ‘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용퇴는 그간 고생한 경영진에 대한 예우의 표현일 뿐 모든 퇴임 인사는 결국 인사권자의 뜻”이라고 했다.
◇임원 감축, 부회장단 해체
주요 기업들은 혹독한 허리띠 졸라매기에 돌입했다. SK그룹이 SK텔레콤 임원을 30% 감축한 것이 대표적이다. LG그룹도 올해 임원 승진자를 역대 최소 수준인 98명으로 축소하며, 2년 새 승진자를 30%가량 줄였다. 비용과 조직을 슬림화하고 빠른 의사 결정 체계를 갖추겠다는 뜻이다. 한 대기업 부장은 “요즘 ‘김 부장 이야기’ 드라마가 화제인데, 임원들이 대규모로 집에 가는 것을 보면서 임원보다 만년 부장으로 오래 있는 게 낫다는 얘기들을 요즘 많이 한다”고 했다.
‘부회장단’도 해체됐다. 삼성그룹 ‘2인자’였던 정현호 부회장의 퇴임을 필두로, LG는 2인 부회장 체제를 1인(권봉석 LG 부회장)으로 줄였다. 롯데는 부회장단 4명을 전원 퇴임시키면서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해 각 계열사 중심의 책임 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그룹 2인자 역할을 해온 부회장들은 보고-결재 라인의 핵심이었지만, 위기 상황에서 신속한 의사 결정을 저해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한마디로 폼 잡는 것 그만하고 진짜 일할 사람들만 남기겠다는 메시지”라고 했다.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부회장들은 보통 기타비상무이사 직함을 달고 계열사 이사회에 포진해 사장급 CEO를 견제하며 총수의 경영 방침을 전달하고 감시하는 역할이었는데, 그런 단계를 없애고 오너가 직접 빠르게 지휘하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젊은 오너와 ‘39세 상무’ 시대
지난달 취임한 정기선(43) HD현대 회장을 비롯한 젊은 오너 3·4세들은 일제히 경영 전면에 나섰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 신유열(39) 부사장도 미래 신사업을 담당하는 롯데바이오로직스 각자대표에 오르며, 국내 사업에서 첫 대표이사 타이틀을 달았다. 구자열 LS 이사회 의장의 장남 구동휘(43) LS MnM 대표이사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했고, 이재현 CJ 회장의 장남 이선호(35) CJ 미래기획실장도 미래 신사업을 이끄는 미래기획그룹장에 선임되며 역할을 확대했다.
임원 나이도 점점 낮아지며 ‘39세 상무, 50세 대표’ 시대가 됐다. 통상 39세면 과장·차장, 50세는 상무 정도의 나이지만 이젠 두 단계를 건너뛴 것이다. 삼성과 LG에서 39세 상무가 나왔고, CJ에선 36세 임원도 나왔다. CJ는 “전체 임원 승진자 중 1980년대 이후 출생자가 45%”라고 했다. 롯데그룹도 롯데백화점 대표에 역대 최연소인 정현석(50) 대표를 임명했다.
인사 시스템도 실용적으로 변했다. 연말까지 기다리지 않고 필요하면 즉시 교체하는 ‘수시 인사’가 늘고 있다. SK그룹은 올해 사장단 인사를 한 달 앞당겼고, LG그룹도 일부 계열사 인사를 조기 단행하며 “향후 필요하면 유연하게 수시 인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한화그룹은 이미 수시 인사가 자리 잡았다. 재계 관계자는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