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국내 전기차 시장에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 규모를 올해 7150억원에서 내년 9360억원으로 약 30% 증액하며 수요 진작에 나서자, 유럽과 중국 브랜드들이 잇따라 신차 출시를 예고하며 한국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나선 것이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속에서도 국내 시장은 지난 13일 기준 올해 전기차 보급 대수 20만1000대를 기록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연간 20만대 보급 기록을 세웠다. 2021년 처음 연간 10만대를 넘긴 이후 4년 만이다. 문제는 거세지는 경쟁 구도다. 한국 시장의 성장성을 확인한 중국 업체들은 3000만원대 전기차를 앞세워 중저가 시장 공략을 확대할 전망이다. 유럽 브랜드들은 고성능 전기차, 대형 전기 SUV 등 고급 시장을 정면 겨냥하고 있다. 한국 완성차 업계로선 안방에서 보급형부터 프리미엄 시장까지 유럽과 중국의 거센 압박을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다.
◇中 BYD 이어 지커·샤오펑도 가세
미국, 유럽의 관세 장벽에 직면한 중국 전기차 업체는 충전 인프라가 우수한 한국 시장을 제3 시장 진출을 위한 시험대로 삼아 공략하고 있다. 특히 전기차 시장 세계 점유율 1위 중국 BYD가 ‘중국차는 안 된다’는 편견을 깨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해 4월 한국에 상륙한 BYD는 ‘아토3’ ‘씨라이언’ 등 중저가 모델을 앞세워 연간 5000대 판매 달성이 유력하다. 씨라이언은 최근 수입차 월간 판매 10위권까지 진입, 중국산 자동차에 대한 국내 소비자들의 심리적 장벽이 낮아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후발 주자들의 진입도 이어진다. 지리자동차의 전기차 브랜드 ‘지커’도 내년 1분기 판매를 목표로 한국 법인 설립과 대표 선임을 마쳤다. 준중형 SUV 전기차 ‘7X’가 첫 출시 모델로 거론된다. 샤오펑(Xpeng) 역시 올해 6월 한국 법인을 설립하고 내년 중형 SUV ‘G6’ 출시를 예고했다. 두 차종은 현대차 아이오닉5, 기아 EV5와 경쟁할 전망이다.
유럽 브랜드들은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적용해 출력·주행거리를 대폭 개선한 고성능 모델을 투입한다. BMW는 내년 차세대 전기차 플랫폼인 ‘노이어 클라쎄’를 적용한 첫 양산 전기차 ‘뉴 iX3’를 국내에 선보인다. 한국 수입 중형 SUV 시장의 베스트셀러인 모델 ‘X3’의 전기차 버전이다. 포르셰는 브랜드 최상위 모델인 ‘카이엔 일렉트릭’을 2026년 하반기 출시해 프리미엄 수요를 흡수한다는 계획이다. ‘강남 싼타페’로도 불리는 인기 SUV 차종 카이엔의 전기차 모델이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준중형 SUV ‘디 올-뉴 일렉트릭 GLC’ 국내 출시를 앞두고 있다. 스테디셀러 모델 GLC의 첫 순수 전기 SUV 모델이다. 107kWh 대용량 배터리를 탑재해 약 600㎞ 주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소비자의 주행거리 불안을 해소한 모델이다. 볼보도 내년 1분기 준대형 전기 SUV ‘EX90’을 출시한다.
◇샌드위치 경쟁 압박 놓인 韓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가 고급 전기차 시장을, 중국 업체들이 보급형 시장을 압박하는 ‘샌드위치’ 구도 속에서, 국내 완성차 업계는 시장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국내 전기차 판매량은 18만9053대다. 국내 브랜드가 점유율 약 60%대를 기록하고 있지만, 배터리 가격 평준화, 보조금 정책, 신차 증가 등으로 인한 소비자 선택지 확대로 시장 점유율 유지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대차그룹은 ‘기술 고도화’와 ‘라인업 확대’라는 투 트랙 전략을 내세웠다. 현대차는 내년 중 플래그십 전기 SUV ‘GV90’을 출시해 유럽 프리미엄 모델들과 경쟁할 예정이다. 현대차의 차세대 전기차 플랫폼 ‘eM’ 기반으로 기존 전기차 대비 주행거리를 50% 향상시킬 것으로 예상되는 차량이다. 기아는 보급형부터 대형 SUV 모델까지 촘촘한 라인업을 구축해 중국의 저가 공세에 대응한다. 전체 자동차 시장에서도 점유율을 높여가는 전기차 시장 수성은 핵심이기 때문이다. 연간 국내에서 신규로 등록되는 자동차 중 전기차 비율은 올해 약 13.5%까지 올랐다.
이에 따라 내년 국내 전기차 시장은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대신, 제조사의 생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자문위원은 “정부의 보조금 증액은 시장 활성화에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국내 기업들은 치열한 경쟁 시장에 놓일 것”이라며 “내년은 국내 제조사들이 가격 경쟁력과 기술적 완성도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증명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