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도시들의 위기는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제조업 중심 성장 모델’의 유통 기한이 끝났음을 알리는 경고다. 전남 여수(석유화학), 경북 포항(철강) 등 주요 산업 도시들은 특정 제조업에 뿌리를 두고 성장해 왔다.

본지가 인터뷰한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박병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 정성훈 국제지역학회장, 정재우 경북대 경영학부 교수, 허문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상 가나다순) 등 전문가 5인은 지방 산업 도시의 위기를 “특정 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20년 넘게 방치된 산업 다변화 실패의 청구서”라고 정의했다. 이들은 △제조업 집착에서 탈피한 AI 전환 △기존 산업단지의 점진적 방향 전환 △인재를 끌어들일 ‘청년 정주(定住)’ 패키지 △산업 기반에 따른 투 트랙 전략이라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김영근 기자 지난달 17일 전북 군산시 소룡동 옛 한국GM 군산 공장 부지 정문이 닫혀 있다. 이 공장은 2018년 GM이 폐쇄 결정을 내린 후 2019년 자동차 부품 업체 명신에 인수됐다. 명신은 중국 업체에서 위탁 생산 물량을 받아 연간 10만대 이상의 전기차를 생산하려 했지만, 작년 5월 완성차 사업을 중단했다.

◇중국 제조업 못 이긴다... 산업 다변화 시급

지방 산업 도시 몰락의 근본 원인은 ‘글로벌 경쟁력 상실’에 있다. 한국이 자랑하던 제조 기술 격차가 중국의 압도적인 물량과 기술 추격 앞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박병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현실 직시를 주문했다. 그는 “중국은 연간 400만~500만명의 이공계 졸업자를 배출하고, 박사는 세계 최대 규모”라며 “현재 한국의 기술과 인력 수준으로는 중국의 ‘인해전술’ 제조업을 이길 수가 없다”고 했다.

박 전 수석은 “지난 20여 년 동안 특정 제조업에 의존하는 구조의 위험성을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결과적으로 정책 전환 시기를 놓쳤고 지방 산업 도시의 위기가 왔다”고 진단했다. 지식산업·고부가가치 산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전환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것이다.

박 전 수석은 그럼에도 한국의 ‘디지털 유전자’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미국·중국을 제외하면 AI(인공지능)·소프트웨어 역량을 갖춘 국가가 많지 않고, 네이버·카카오 등 플랫폼을 가진 한국은 여전히 기회가 있다”며 “이제라도 한국은 특정 제조업 의존 구조를 AI·소프트웨어 중심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굴뚝 산업의 자리를 디지털 혁신 산업과, 지역 특색을 살린 관광·서비스·농업 등으로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전 수석은 “농림축산업, 서비스산업 등 모든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며 “더는 제조업이 경쟁력 없는 산업을 짊어지고 갈 처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하루아침에 철강 도시를 AI 도시로, 조선 도시를 관광 도시로 바꿀 수는 없다. 정재우 경북대 경영학부 교수는 현실적 대안으로 ‘연관 산업으로의 점진적 전환’을 제안했다. 기존 인프라와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로 산업 생태계를 조금씩 옮겨가는 전략이다. 산업단지의 업종 다변화를 고민해도 이미 유관 기업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극적인 변화는 어렵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비슷한 업종으로 전환해 클러스터를 유지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구미 국가산단’을 사례로 제시했다. 구미는 대기업의 이탈로 위기를 맞았지만, 기존 전자 산업의 노하우를 살려 배터리와 방위 산업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정 교수는 “구미는 1970년대 전자 산업으로 호황을 누렸지만, 중국·베트남으로 공장이 이전하며 공동화됐다”며 “전자 장비, 이차전지 부품, 방산 소부장으로 조금씩 전환하며 다시 활력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주(定住) 여건 개선, 지역별 투 트랙 접근 등 전략 필요

전문가들은 산업 구조 개편만큼이나 ‘청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핵심 과제로 꼽았다. 일자리가 있어도 청년이 오지 않는 ‘미스매치’의 원인은 단순한 임금 격차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두뇌 노동의 시대에서는 모든 것이 경험이고 자산이 된다”며 “청년들은 단순한 급여보다 자기 성장을 위한 환경을 찾아 수도권으로 떠난다”고 분석했다. 지방에는 일만 있을 뿐, 퇴근 후의 삶과 자기 계발의 기회가 없다는 지적이다. 마 교수는 “기업에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지방에서 근무하는 청년 근로자도 교육·보육·문화 체험 등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패키지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성훈 국제지역학회장(강원대 교수)도 “지역 위기의 본질은 인재 부족”이라고 진단했다. 정 교수는 “지역 대학·기업·연구소가 유기적으로 연계된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스타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고 말했다.

허문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획일적인 균형 발전론이 아닌 산업 기초 체력 여부에 따른 ‘투 트랙(Two-track) 접근’을 제안했다. 산업 기반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처방전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허 연구위원은 “울산·포항 같은 곳은 중장기 전략 산업 거점으로 지정해 기업이 이전하기 전부터 전문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예컨대 2년 후 공장이 완공된다면, 그 시점에 투입할 수 있는 인재를 지금부터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산업 기반이 부족한 지역은 “스마트 농업 등 고부가가치 1차 산업을 키우고, 귀농·귀촌 인구를 정착시켜 정주 인구를 늘려나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무조건적인 산업화 강박에서 벗어나 특성에 맞는 생존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