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울산 미포만에서 유조선 한 척이 뱃고동을 울렸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와 조선소가 들어설 백사장 사진 한 장을 들고 세계를 오가며 수주한 26만t급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Atlantic Baron)호’였다. 그로부터 51년 만에 HD현대가 세계 조선 역사상 최초로 선박 5000척 인도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1호 선박과 5000호 선박 - 1974년 6월 28일 울산 조선소에서 현대중공업이 처음으로 만든 배 '애틀랜틱 배런'호를 비롯한 초대형 유조선 1·2호선 명명식이 열리고 있다(위 사진). 아래 사진은 51년 뒤인 올해 HD현대가 5000번째로 인도한 필리핀 초계함 2호 '디에고 실랑함'의 모습. /HD현대·연합뉴스

5000번째 배는 필리핀 해군의 초계함 2호 ‘디에고 실랑함’이었다. 길이 118m, 최신예 함정이다. HD현대중공업은 드론으로 촬영한 함정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전달했고, 필리핀 해군 관계자들은 함정에 직접 승선해 운항하며 배치 지역으로 이동했다.

HD현대는 19일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선박 5000척 인도 기념식’을 열고 “세계 조선 역사상 최초로 단일 기업 기준 누적 선박 인도 5000척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고 밝혔다. 장구한 조선업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과 일본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자, 2000년대 이후 물량 공세를 퍼부어온 중국의 국영 조선소들조차 넘보지 못한 이정표다. HD현대는 1호 선박이었던 애틀랜틱 배런을 시작으로 지난 50년간 68국 700여 선주사에 선박을 인도했다. HD현대중공업이 2631척, HD현대미포가 1570척, HD현대삼호가 799척을 인도했다.

◇500원 지폐 한 장으로 시작된 기적

선박 한 척의 길이를 통상 250m로 가정했을 때, 5000척을 일렬로 늘어 세우면 1250㎞에 달한다. 서울에서 도쿄까지의 직선거리(약 1150㎞)를 훌쩍 뛰어넘는다.

1972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 건설을 추진할 당시 일본은 “한국 경제 규모에 5만t급 선박의 건조 능력만 갖추면 충분하다”며 “조선소를 짓더라도 기술이 없어 대형선은 절대 못 만든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1974년 6월 조선소 준공과 1호선 인도를 동시에 해냈다. 세계 조선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행사에 참석해 “오늘 명명식은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기약하는 선언이자 도약하는 국력의 상징”이라 말했다.

그래픽=양인성

◇상선에서 군함까지, 패스트팔로어에서 퍼스트무버로

초기 유조선과 벌크선 등 상선 위주로 시장을 따라가던 ‘패스트팔로어’ 한국은 이제는 시장을 선도하는 ‘퍼스트무버’로 자리매김했다. 마침 대기록 달성은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가 본격화되는 시점과 겹쳤다. 5000번째 배가 상선이 아닌 최신예 군함이라는 점도 의미가 깊다. HD현대를 비롯한 한국 조선 업계는 미 해군 함정 MRO(유지·보수·정비)를 넘어, 건조까지 바라보며 글로벌 해양 방산 강자로 도약을 꾀하고 있다. 5000척을 건조하며 쌓은 압도적인 경험과 납기 준수 능력은 그 자체로 ‘세계 최고의 건조 능력’을 입증한다.

하지만 중국과의 경쟁은 여전히 버거운 싸움이다. 중국은 정부 보조금을 앞세워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범용 선박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HD현대는 고부가·고난도 선박에 집중하면서 친환경 선박과 자율운항 기술로 미래 ‘수퍼 사이클’에 대비하고 있다. 정기선 회장은 이날 “HD현대는 AI·탈탄소 연료·자율운항 기술 등 미래 해양 혁신의 최전선에서 더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바다를 향한 항해를 계속할 것”이라며 “다음 5000척, 또 다른 반세기를 향해 힘차게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