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산업단지의 전경. 한때 ‘신의 직장’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석화 산단 3대 기업 중 하나인 여천NCC가 지난 8월 3공장 가동을 멈추는 등 중국발 공급 과잉의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침체의 충격은 대기업뿐 아니라 생태계 곳곳으로 번지며 협력사들의 일감까지 줄이고 있다. /전라남도

지난 9월 26일 오후, 전남 여수 석유화학 산업 단지 내 용호기계기술 1공장엔 적막이 감돌았다. 이 회사는 1997년 여수 산단에서 시작한 향토 중소기업이다. 석화 단지의 나프타 분해 설비(NCC) 등에서 쓰는 고압 용기를 제작·설치하는 등 석유화학 플랜트 관련 사업을 주로 한다. 설립 초기엔 대표가 직원 한두 명과 현장을 뛰었지만, 20여 년간 여수 석화 산단의 성장과 함께 회사도 같이 커왔다. 2023년엔 매출 1000억원을 기록했고, 직원도 130명이 넘어섰다.

그때가 정점이었다. 용접 불꽃과 철을 두드리는 소리로 요란해야 할 현장은 이제 인적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직격탄을 맞자 이 회사도 일감이 호황기 대비 70% 가까이 급감했다. 지난해 매출은 500억원으로 2023년 대비 반토막이 났다. 올해는 상황이 더 나쁠 가능성이 높다.

이날 찾은 1공장은 당초 800평에서 2020년 3배 이상인 2600평으로 확장했다. 동남아 등 신흥국의 경제성장이 이어지며 ‘산업의 쌀’로 불리는 석유화학 제품 수출이 더 늘 것이란 기대가 컸다고 한다. 용호기계기술도 당시 100억원을 들여 증설을 했다.

지금은 산단뿐 아니라 여수 지역 전체가 휘청이고 있다. 소구영(66) 사장은 “석유화학 산업이 쓰러지기 시작하니 이 지역에서 살며 가정을 꾸리고 했던 직원들이 갈 곳도 제대로 없다”면서 “이 산업을 살리는 게 여수를 살리는 길이라, 빨리 해법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절박한 처지의 용호기계기술은 여수 밖 다른 업종에서 사활을 걸고 일감을 찾아 나섰다.

◇대기업도 못 버텼다

같은 날 찾아간 여천NCC 3공장은 가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1000도가 넘는 열로 나프타를 가열해 에틸렌 등을 뽑아내느라 공장 주변은 늘 열기로 인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고 한다. 한때 대형 생산 설비가 돌아가며 내는 굉음이 주변을 메웠지만, 이날은 인적도 없이 스산했다. 여천NCC 관계자는 “전기료와 연료비 등 월 40억~50억원에 이르는 에너지 비용이라도 아끼려 공장을 멈췄는데 언제 다시 돌릴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고 했다. 유지비라도 아껴보려는 고육지책인 셈이다.

여수 석화 산단 3대 대기업 중 한 곳인 여천NCC는 2009년부터 2021년까지 13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중국발 공급 과잉’ 태풍이 몰아친 2022년부터 3년 연속 영업 적자를 냈고 적자 규모가 약 7800억원에 이른다. 올들어 3분기까지 합치면 적자 규모는 9700억원이 넘는다. 결국 지난 8월부터 3공장 가동을 아예 중단했다.

석유화학 호황기 여천NCC는 취업 준비생 사이에서 ‘신의 직장’으로 불렸다. 2010년대 초반 삼성전자를 제치고 연봉 1위를 한 적도 있다. 이젠 신규 채용은 엄두도 못 내고, 내부에선 자발적 퇴사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8월에는 부도설까지 불거지면서, 대주주인 한화그룹과 DL그룹이 자금 5000억원을 긴급 수혈해야 했다.

◇불황의 도미노

수조 원이 드는 초대형 설비와 대규모 원료가 필요한 석유화학 산업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수직 계열화가 불가피하다. 대기업이 수조 원을 조달해 시설을 운영하면서 최종 제품을 생산·수출하고, 이 과정에 수많은 2~4차 협력사가 관여하는 구조다. 입주 기업만 따져도 올 2분기(4~6월) 기준 여천NCC와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대기업을 비롯해 137사다. 직간접 고용 규모가 2만1900명에 이른다.

침체의 충격은 석유화학 산업 생태계 곳곳으로 번지는 중이다. 17일 한국화학산업협회에 따르면, 여수 산단 여천NCC와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NCC 3사가 협력사에 발주한 금액은 2022년 2조145억원에서 작년 1조1195억원 수준으로 거의 반 토막 났다. 협력사들의 생명줄인 대기업발 일감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업체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여천NCC와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여수 산단 NCC ‘빅3’의 협력 업체 수는 2022년 2698곳에서 작년 2279곳으로 15.5%나 감소했다. 400여 곳이 협력업체 리스트에서 사라진 것이다.

협회 측은 “불황으로 인해 석유화학 대기업이 대대적인 비용 절감에 나서면서 협력 업체 매출액이 연쇄적으로 줄고 있다”며 “공장 가동 자체가 줄면서 설비 신설이나 증설 등 공사 계약은 2022년 대비 61% 감소해 연관 산업인 플랜트 건설·유지 보수 업체의 경영 악화가 심각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