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얘기는 안 하겠다. 9·11 추모식만 참석하겠다.”
지난 9월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 장관에게 보낸 이 문자는 한·미 관세 협상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양국은 7월 말 큰 틀의 합의를 이뤘지만, 미국이 8월 초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펀드에 대해 ‘전액 현금 선불’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틀어졌다. 러트닉은 김 장관이 보낸 수십 통의 문자도 무시했다. 그러던 중 9·11을 계기로 보낸 김 장관의 문자에 “네, 고마워요(Yes, Thank you)”라는 뜻밖의 회신이 왔다.
김 장관은 지난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본지와 한 인터뷰에서 “약 100일간 대면·화상을 합쳐 러트닉과 30차례 협상했는데 결국 9·11 추모식이 결정적 분수령이었다”고 말했다. 미 투자은행 CEO 출신인 러트닉은 2001년 9·11 테러로 동생과 동료 656명을 잃었다. “열심히 사는 이유가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던 그의 말을 기억해 추모식에 갔는데 외부인이 온 건 처음이라더군요.”
그 직전까진 미 워싱턴 DC까지 찾아간 협상 실무진을 만나주지도 않을 정도로 관계가 경색된 상황이었다. 김 장관이 러트닉에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게 아니냐’며 항의 메시지를 보낼 정도였다. 하지만 이 9·11 추모식을 계기로 협상은 극적으로 재개됐고, 러트닉이 처음으로 한국의 ‘분할 투자’ 방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타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관세 협상 분수령은 ‘9·11 추모식'
지난달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 회의 기간 만난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 왕이 중국 외교부장 등은 “러트닉과 30번 협상했다”는 김 장관 말에 놀랐다고 한다. 러트닉의 터프한 스타일 때문에 자주 만날 수도 없었지만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그간 나도 정말 고생했다. 하지만 추모식 다음 날 뉴욕에서 다시 만났을 때 러트닉은 처음으로 소리를 안 지르고 차분하게 대화하며 ‘3500억달러 분할 투자’ 개념에 수긍해줬다”고 했다. 이에 김 장관은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경험을 얘기하며 “외환시장에서 위기가 생기면 한국 국민은 경기(驚氣)를 한다. 동맹국인 미국이 그렇게 만들려는 거냐는 우려가 있다”고 설득했다. 그는 “IMF 금모으기 운동 때문에 나도 결혼 반지가 없다는 얘기까지 했다”고 했다. 협상 과정 동안 수차례 거론된 ‘한미 통화스와프’ 필요성도 이때 김 장관이 제안한 것이다.
분할 투자에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진통은 계속됐다. 미국은 처음엔 연 300억달러씩 10년을 제시했다. 250억달러씩 10년을 거쳐, 한국은 연 200억달러씩 10년을 최종 제안했다. 김 장관은 “이 과정에서 ‘이렇게 합의하면 나는 직(職)을 내려놔야 한다’ ‘이 정도 요청했으니 좀 받아달라’고 몇 번이나 말하며 얼마나 옥신각신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경주 한미 정상회담 당일인 10월 29일 아침까지도 미국은 무응답이었다. 수많은 나라 앞에서 양국의 불협화음이 노출되는 사태마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날 오전 7시 40분 김 장관은 도쿄의 러트닉에게 ‘우리가 여기까지 잘 왔고 마지막에 와 있다. 좀 더 협상하면 답을 찾지 않겠느냐. 우선은 양국이 (협상이 깨지지 않도록) 메시지 관리만이라도 하자’는 문자를 보냈다. 그날 아침 읽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리라’는 성경의 한 구절에, ‘수치’를 피하기 위한 메시지 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오전 8시 30분쯤 러트닉에게서 뜻밖의 회신이 왔다. 김 장관은 “환영(幻想·헛것)인가 싶었다”고 했다. 한국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답변이었다. “러트닉에게 ‘정말 맞느냐’고 몇 차례나 확인했고 경주에서 다시 세부 협상을 거친 뒤 양측이 대통령 보고를 마친 시각이 낮 12시 40분이었습니다.”
그는 “협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협상장을 떠날 수 있는 용기’인 것 같다”며 “대통령이 독촉하지 않고 중심을 잡아주신 덕분에 가능했다”고 했다.
◇“기업이 국력이더라…조선·원전 같은 산업 육성해야”
김 장관은 “미국의 제조 기업들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던 러트닉의 토로를 잊을 수 없다”며 “기업 하나 만드는 건 어렵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고 했다. 러트닉은 “미 상무부 깃발이 돛을 단 범선 문양인데 상무부에 정작 조선 산업 담당자가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러트닉이 ‘정부와 기업이 이렇게 한 몸처럼 움직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더라’며 놀라더군요. 제가 뭘 설명하면 즉각 부정하는 그였지만 좀 지나면 ‘결국 네 말이 맞더라’고 수긍해요. 그 사이에 우리 기업들이 미국 각계에 설명한 내용이 러트닉에게까지 전달됐던 겁니다.”
김 장관은 “조선업 말고도 미국이 ‘한국 아니면 안 된다’는 산업이 서너 개만 더 있었다면 협상 판도가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미측이 한국에 아쉬워한 분야가 조선·원자력 발전 분야 뿐이라는 게 내심 아쉬웠고, 다른 산업도 육성할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력은 곧 기업의 힘이라는 걸 느꼈다”며 “우리 기업 하나하나가 소중한 존재란 걸 국민과 공무원들이 알아달라”고 했다.
러트닉에 대해서는 “힘든 상대였지만 투철한 애국심, 제조업 부활에 대한 사명감만큼은 우리 공무원도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협상을 거치며 가까워진 두 사람은 협상 타결 발표 직후 경주의 한 고깃집에서 한우를 먹으며 극적 합의를 자축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장관을 두고 ‘터프한 협상가’라고 칭한 것도 이날이었다.
한편 김 장관은 “이번 협상을 양국이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내는 게 남은 과제”라며 “대미 투자가 최대한 우리 기업에 활용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때도 ‘우리 산업 다 망한다’고 했지만 러트닉은 도리어 ‘한미 FTA가 미국 경쟁력을 해쳤다’고 생각하더라”며 “FTA를 통해 우리 기업들이 실질적 이익을 가져갔듯 대미 투자 펀드도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과 신산업 확장의 새로운 도구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