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인물은 단연 ‘페이커(본명 이상혁·29)’다. ‘롤’이라 불리는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의 간판 스타이자 프로 게이머인 그는 ‘Z세대의 우상’이라는 설명으론 부족한 인물이다. 그가 움직이면 글로벌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 바뀌고, 대통령과 재계 총수, 글로벌 기업 CEO까지 러브콜을 보낸다. 그는 이미 하나의 ‘산업·문화 현상’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치맥 회동으로 한국을 뒤흔든 엔비디아 젠슨 황 CEO는 지난달 30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행사에서 “페이커”를 연호했다. 그는 “여러분을 완전히 반하게 할(blown away) 인물”이라며 페이커를 소개했고, 영상 메시지가 등장하자 현장 관객과 함께 ‘페이커, 페이커, 페이커’를 외쳤다.
지난 9일 중국 청두에서 열린 ‘롤드컵(LoL 월드챔피언십) 2025’ 결승에서 페이커가 주장을 맡은 한국 팀 T1이 사상 첫 3연패를 달성하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전설이 끝없이 이어지길 기대한다”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T1은 SK스퀘어와 세계 최대 케이블TV 업체인 미 컴캐스트가 합작 운영하는 구단이다.
다음 날 이재명 대통령도 축전을 보내 “e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라며 “참으로 자랑스럽다”고 치하했다. 현직 대통령과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기업 총수가 페이커에게 보낸 관심은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1834로 통하는 길, 페이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월간 순 이용자는 약 1억2000만명이다. 그 중심이 ’1834′, 즉 18~34세의 Z세대다. 이번 결승전 동시 시청자는 673만명(중국 플랫폼 제외)이었다. 총 시청 시간만 1억3550만 시간, e스포츠 역사상 둘째로 높은 수치다. 공식 통계를 얻기 어려운 중국 플랫폼을 제외한 수치다. 결승 당시 T1 선수들 유니폼에 삼성과 SK텔레콤, 메르세데스-벤츠, 레드불, 스포티파이 같은 글로벌 유명 브랜드 로고가 빼곡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이브 중계를 통해 전 세계를 향해 실시간 노출되는 페이커와 팀원들은 전 세계 Z세대의 이목을 사로잡는 ‘움직이는 광고판’인 것이다.
올해 롤드컵을 유치한 중국은 3주에 걸쳐 베이징, 상하이, 청두를 순회하며 성대하게 대회를 치렀다. 8강과 준결승 경기가 열린 상하이 경기장 이름이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라는 것은 글로벌 기업들이 ‘돈의 흐름’에 얼마나 민감한지 보여준다. 세계 챔피언 T1의 최상위 스폰서는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가 수장을 맡고 있는 미래 도시 프로젝트 기업 ‘레드시 글로벌’이 꿰찬 상태다.
‘페이커 효과’는 국내 온·오프라인 소비 시장도 뒤흔들고 있다. 롤드컵 3연패 직후 여성 패션 플랫폼 1위 ‘에이블리’가 T1과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 에이블리가 국내 프로 스포츠 구단과 맺은 첫 파트너십이다. T1 경기장의 실제 관객은 여성 비중이 압도적인 현실을 반영한 선택이다. T1 스폰서이자 공식 유니폼 제작사인 ‘골스튜디오’의 강정훈 대표는 “지난해 10만원대에 출시했던 롤드컵 재킷이 품절되자 리셀마켓에서 90만원대에 팔릴 정도”라며 “세계 10여 국에서 유니폼을 사겠다고 몰리는 국내 스포츠팀은 T1이 유일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T1 스폰서 리스트엔 스타트업부터 대웅제약, 도루코 같은 중견기업까지 망라돼 있다. 페이커는 올해에만 삼성 갤럭시S25, 팔도 왕뚜껑 라면, 가상 화폐 거래소 업비트, 입시 기업 대성마이맥 등 여러 기업들의 광고 모델로 출연하고 있다.
◇사회·문화 등 전방위 파급력
게임은 페이커 신드롬을 통해 주류 문화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페이커 파급 효과는 사회, 문화 영역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개관 80주년을 맞아 다음 달 14일까지 진행하는 행사에서 ‘독서광’으로 알려진 페이커의 책장과 굿즈를 본관 1층에 특별 전시하고 있다.
‘강남 8학군’으로 통하는 서울 서초구가 T1 구단과 손잡고 이달부터 6주짜리 ‘e스포츠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른 지자체들도 ‘e스포츠 아카데미’를 잇따라 개설하고 있다. 게임을 마약과 함께 ‘4대 중독’으로 낙인찍었던 과거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e스포츠는 IT 분야 발전에도 촉매제가 되고 있다. 삼성과 SK, LG, 네이버 등이 주축이 된 최첨단 반도체(GPU), 게임용 기기(PC, 모니터), 스트리밍 플랫폼 등의 성장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 e스포츠다. 게임용 그래픽 카드로 성장의 기반을 다진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페이커의 이름을 연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