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14일 ‘한미 전략적 투자에 관한 양해각서(MOU)’에 서명하고 이를 공개했다. 한국은 총 2000억달러를 조선, 에너지, 반도체, 의약품, 핵심 광물, 인공지능·양자컴퓨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 김 장관은 “(현금) 투자는 미국이 초기에 요구했던 3500억달러에서 2000억달러로 43% 축소됐다”며 장기간 이어온 협상의 성과를 강조했다.
양국 간 쟁점이었던 ‘2000억달러 대미 투자 펀드’의 경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임기인 2029년 1월까지 투자할 프로젝트를 선정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투자액이 연간 최대 200억달러로 한정돼, 실제 투자 이행은 약 10년에 걸쳐 장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일본과 유사한 틀 아래 장기 투자
투자 프로젝트는 한국 산업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협의위원회’와 미 상무부 장관이 총괄하는 ‘투자위원회’와 협의한 뒤, 투자위원회가 미국 대통령에게 최종 추천하도록 됐다. 최종 결정은 미 대통령이 내리는 구조다. 투자 수익의 경우 원금이 회수되기 전까지 양국이 반반 나눠 갖되, 회수 이후에는 미국에 90%가 돌아간다.
MOU 1항은 ‘투자위원회는 상업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투자만을 대통령에게 추천하고자 한다’고 명시했다. 김 장관은 “충분한 투자금 회수가 보장되는 투자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20년간 투자금 회수가 명백하게 어려워 보이는 경우, 우리 정부가 미 측에 투자 수익 배분율 조정을 요청할 권한도 마련됐다.
원금 회수 가능성을 한층 더 높이는 차원에서, 프로젝트마다 ‘한국이 추천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를 선정’하기로 했다. 프로젝트 매니저는 미·일 합의에는 거론되지 않았던 직책이다. 다만 결국 투자 추천 및 결정 권한이 모두 미 측에 있어 우리 측 입장이 얼마나 반영될지 미지수라는 지적도 나온다.
투자액이 우리 기업의 대미 진출에 최대한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항목도 MOU에 명시됐다. 투자 프로젝트에 상품·서비스를 제공할 업체를 선정할 때 가능하면 ‘유사한 외국 업체 대신 한국 업체를 선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다. 이는 미·일 합의에도 포함된 문구다. 김 장관은 “협상 과정에서 기업인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다”며 “최대한 우리 기업 요구와 수요를 반영해 (펀드를) 운용하겠다”고 했다.
MOU에 따르면, 미국이 투자금을 요청하면 우리는 영업일 기준 45일이 경과한 날 납입해야 한다. 이행하지 않을 경우 대미 관세는 다시 인상될 수 있다. 외환시장 불안 등이 우려되는 경우 정부는 납입 시기나 규모 조정을 요구할 수 있다.
◇마스가, 대출보증 포함
3500억달러 중 나머지 1500억달러는 ‘마스가(MASGA) 프로젝트’로 불리는 양국 조선 협력에 투입된다. 전략 산업에 투입되는 2000억달러가 전액 직접 현금 투자인 반면, 마스가 펀드는 한국 기업의 대미 직접 투자(FDI)와 이에 대한 금융기관의 대출보증 등도 포함된다. 수익은 우리 기업에 귀속된다.
조선 투자는 MOU에 ‘승인 투자’라고 명시됐고, 승인 주체는 ‘투자위원회’로 규정됐다. 한국 측 투자·대출·보증 행위가 마스가 펀드 이행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투자위원회가 확인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승인 절차나 기준은 명시되지 않았다. 다만 팩트시트에 명시된대로 현지 조선 인력 양성, 유지·정비·보수(MRO), 조선소 현대화 등에 협력하는 데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비관세 장벽 완화도
이날 MOU에 앞서 우리 대통령실과 백악관이 동시 공개한 ‘팩트 시트’에는 7월 말 양국이 합의한 ‘비관세 장벽 완화’ 내용도 구체적으로 나열됐다.
대표적으로 양국은 ‘한국의 디지털 서비스 분야 관련 법·정책이 미국 기업을 차별하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구글·넷플릭스 등에 ‘망 사용료’를 별도로 부과하거나, ‘온라인 플랫폼법’을 통해 빅테크 플랫폼을 새로 규제하기는 어려워질 전망이다. 다만,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과 관련한 항목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날 발표에도 양국 간 추가적인 협의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당장 이날 김 장관은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는 상업적 합리성이 없어 참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러트닉 상무장관이 지난달 30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한미 투자 프로젝트로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를 유력하게 검토한다는 취지의 글을 올린 것과 대조적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팩트 시트·MOU로 총론에 대한 합의는 마무리됐지만, 이행 과정에서 또 ‘각론’을 둘러싼 협의가 필요할 것”이라며 “추후 이어질 미국의 불공정한 통상 압박이나 비관세장벽 추가 완화 요구 등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