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탈(脫)탄소 정책을 겪은 유럽은 전력 가격 급등과 공급 불안, 산업 경쟁력 약화라는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대책 없이 재생에너지만 늘리다가는 ‘탈산업화’에 직면한 유럽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릅니다.”(조홍종 자원경제학회장)
정부가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2018년 배출량 대비 53~61% 수준으로 높이고, 내년부터 2030년까지 5년간 발전사들에 탄소 배출권 비용 14조원을 떠안기기로 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정부의 탈탄소 드라이브에 대한 산업계의 우려가 커진 가운데, 한국자원경제학회와 민간발전협회는 12일 ‘급격한 탈탄소 정책이 탈산업화를 초래한 유럽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높은 전기료에 고통받는 유럽
이날 서울 양재 엘타워에서 ‘유럽 에너지 전환 과정으로 본 한국 전력 시장 개편’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는 학계와 업계 인사 50여 명이 참석했다. 전문가들은 ‘급진적 탈탄소로 산업 경쟁력 붕괴와 전력 시스템 불안정을 겪고 있는 유럽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전우영 서울과기대 교수는 “에너지 전환 속도가 빠른 유럽은 전력 가격이 폭등했다”며 “전력 수요가 15년 새 8%나 줄어든 것은 산업 경쟁력이 추락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탈탄소 정책을 추진해 왔다. 유럽연합(EU)은 2030년까지 전기와 냉난방, 수송 부문을 포함한 최종 에너지 소비의 최소 42.5%를 재생에너지로 채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이 같은 급속한 전환은 전기 요금 급등, 전력망 불안, 산업 경쟁력 약화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았다.
유럽기업연합(BusinessEurope)에 따르면, 2024년 기준 EU의 평균 산업용 전기 요금은 kWh당 0.199유로로, 중국의 2.4배, 미국의 2.65배 수준이다. 이런 고비용 구조는 전력 다소비 업종인 금속·화학 산업 등에 치명타를 가했다. 특히 알루미늄·비료·아연·시멘트·유리 산업 등은 2022~2023년 대규모 감산과 폐쇄가 이뤄졌다. EU 내 아연 제련소 9곳 모두가 감산 또는 조업 중단을 했고, 유럽의 알루미늄 생산은 50% 넘게 급감했다. 유럽이 2022년 사상 처음으로 화학 제품 순수입국으로 전환한 것도, 고비용 구조로 화학 산업이 무너진 결과였다.
유럽의 제조 강국 독일도 예외가 아니다. 독일상공회의소(DIHK)에 따르면, 해외 이전을 고려하는 독일 기업 비율은 2022년 21%에서 지난해 37%까지 늘었다. 특히 대기업은 절반이 넘는 51%가 해외 이전을 고민 중이라고 답했다. DIHK는 “정부가 기업들에 신뢰할 수 있고 저렴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는 비전을 주는 데 실패했다”며 “에너지 정책에 대한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진단했다. 독일산업연맹을 포함한 유럽의 각 산업 단체는 “지속 불가능한 전기 요금과 규제 부담은 유럽의 산업 경쟁력을 급격히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재앙을 피할 수 없었다.
◇“한국도 송전망 투자부터 해야”
탈탄소를 위한 급진적 에너지 전환은 지난 4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포함하는 이베리아반도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블랙아웃)를 불렀다.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력 구조 아래서 즉시 대응 가능한 예비 전력이 부족했던 게 원인이었다.
이날 세미나에선 “스페인의 사례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지적이 나왔다. 송배전망 확충과 백업 전원(電源) 인프라 등에 대한 대비 없이는 ‘스페인 대정전’ 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연제 서울과기대 교수는 “재생에너지 보급이 늘면 늘수록 전력 계통을 운영하는 데 상상 이상의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의 사례는 탈탄소의 이상(理想)이 현실 경쟁력과 인프라의 한계를 무시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는 “현 정부는 원전에 소극적이고 탄소 중립 목표도 과하게 잡으면서 재생에너지를 급격히 늘리려 하는데, 유럽의 경험을 보면 우리도 제조업 경쟁력을 빠르게 상실할 위험이 크다”고 우려했다. 조홍종 단국대 교수는 “유럽의 교훈을 바탕으로 전기 요금 정상화와 더불어 송배전망 투자 등 균형 잡힌 에너지 전환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