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1일 국무회의를 열고 203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최소 53%에서 최대 61% 감축하는 새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확정했다. 산업계가 “기업의 감축 역량을 고려한 현실적 목표를 수립해 달라”며 요구해 온 48% 감축 목표를 크게 뛰어넘는 수치다.
특히 정부는 발전사들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온실가스)에 대해 지금보다 5배 이상의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방안을 확정했다. 현재 발전사들은 정부가 허용한 온실가스 배출권의 10%만 돈을 주고 사고 나머지는 무상으로 받아왔다. 하지만 내년 15%를 시작으로 2027년 20%, 2030년 50%까지 배출권을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정부는 철강·석유화학 같은 업종은 수출 경쟁력 보호 등을 이유로 현재의 온실가스 무상 배출 비율을 유지했다.
이번 결정으로 발전사들이 앞으로 5년간 탄소 배출권을 사기 위해 추가로 내야 할 돈은 14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전기 생산 원가 상승으로 이어져 전기 요금 인상 압력을 높이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산업계에선 “정부 결정은 산업계 감축 여력과 기업들의 전기 요금 부담을 외면한 처사”라는 비판이 나온다. 최근 3년 반 동안 산업용 전기 요금이 이미 70% 가까이 오른 상태에서, 이번 결정으로 전기 요금이 추가로 오를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특히 주물·도금 등 전기를 많이 쓰는 뿌리 업종 중소기업들은 “전기료가 추가로 오를 경우 버틸 수 있는 기업이 없다”며 정부 차원 대책을 요구했다.
◇3년 70% 오른 전기료 또 인상 불가피… 中企들 생존 기로
11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안건에서 산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발전 부문’의 배출권 유상 할당 비율이다. 발전사들은 전기를 만들 때 석탄이나 LNG 등 화석연료를 쓰면서 탄소를 배출한다. 이 과정에서 탄소 배출 목표를 계획대로 달성하지 못하면, 그 차이만큼 배출권을 돈을 주고 사거나 무상으로 받아야 한다. 국내 발전사 5곳은 지금까지 온실가스 배출권의 10%만 유상(有償)으로 사 왔고, 나머지 90%는 무상으로 받아 왔다. 하지만 내년부터 유상으로 사야 하는 비율이 오르기 시작해 오는 2030년에는 배출권의 절반을 돈을 내고 사야 한다. 반면 수출 비율이 높은 철강·석유화학·시멘트 등 대부분 업종은 종전대로 배출권을 전부 무상으로 할당한다. 식품·건설·통신 등 나머지 업종은 유상 할당 비율을 10%에서 15%로 소폭 높이기로 했다. 온실가스 감축에 따른 비용 부담을 발전사들이 집중적으로 지게 된 것이다.
◇1년 영업이익 절반, 배출권 사는 데 써야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이 4000억~6000억원 수준에 불과한 각 발전사는 배출권 구매에만 매년 수조원을 더 내야 할 처지다. 발전사들의 비용 부담이 눈덩이처럼 늘어 전기 요금 인상 압박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정부는 발전사들이 석탄보다 탄소 배출이 적은 재생에너지와 LNG 발전을 늘리고, 높아지는 NDC 목표에 따라 설비를 개선하면 비용 부담이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민의힘 김위상 의원실이 한국동서·남동·남부·서부·중부발전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다섯 발전사는 2026년부터 2030년까지 배출권 구매에만 약 13조9900억원을 부담해야 할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에 추가로 내야 할 비용만 1조4030억원이다. 지난해 5대 발전사 전체 영업이익의 48%에 달한다. 연간 이익의 절반을 배출권 사는 데 더 써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무상 할당 비율이 점차 줄면서 현재 약 1만원인 배출권 가격이 2030년 최대 6만1000원까지 상승하는 영향을 감안한 추정치다.
발전사들이 짊어져야 할 수조원대 배출권 비용은 결국 기업과 국민의 전기 요금 부담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와 석탄 발전 감축 모두 비용 증가 요인인데, 어떻게 전기 요금 상승 부담을 상쇄한다는 건지 납득하기 어렵다”며 “차라리 정부가 ‘전기 요금은 오를 수밖에 없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했다.
◇무리한 감축 목표에 中企 ‘비상’
온실가스 감축 압박과 전기 요금 인상 우려가 커지면서 전기를 많이 쓰는 중소기업들도 비상이 걸렸다. 특히 대기업과 똑같이 ‘산업용(을)’ 전기 요금을 적용 받는 ‘뿌리 업종’은 생존 기로에 놓였다는 위기감이 크다.
주물·도금·금형 등 뿌리 기업들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2025년 2차 뿌리산업위원회’를 열고 산업용 전기 요금 인상에 따른 부담을 호소하고 해결책을 요구했다. 참석자들은 “이미 과도한 산업용 전기 요금으로 에너지 비용 부담이 큰데 앞으로 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며 “정부가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장용환 경인주물공단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이날 “1977년부터 운영중인 회사인데 지난해 처음으로 적자를 봤다”며 “적자 폭 2억5000만원은 딱 전기료 인상분”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3년간 전기 요금이 70% 올랐고, 제조 원가의 10% 수준이던 전기료가 이젠 20%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뿌리산업위원장인 박평재 한국표면처리공업협동조합 이사장도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크게 높아진 여파로 전기 요금까지 치솟는다면, 제조 원가에서 전기 요금 비율이 큰 뿌리 업계는 버틸 수가 없다”고 했다.
손양훈 인천대 명예교수는 “현 정부 에너지 정책의 중심이 가장 비싼 재생에너지인데 실현 불가능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까지 더해져 전기 요금 상승 압력이 거세지면 영세한 기업들은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했다.
☞온실가스 배출권 유상 할당
국내에서 기업들은 업종별로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 있다. 그 범위를 벗어나면 그만큼 과징금을 내거나 온실가스 배출권을 구매해야 한다. 지금까지 국내 발전 회사는 필요한 배출권의 10%만 돈을 내고 사고, 나머지는 무상으로 할당받았다. 하지만 내년부터 유상 구매 비율이 20%로 늘고 2030년에는 50%까지 커진다. 발전 회사들의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전기 요금 인상 압박이 불가피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