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호(65)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전격 퇴진했다. 정 부회장은 2017년부터 그룹 내 전자 계열사를 총괄하는 사업지원TF장을 맡으며 ‘삼성 2인자’로 불려왔던 인물이다. 삼성은 이와 함께 임시 조직이었던 ‘사업지원TF’를 ‘사업지원실’이라는 상설 조직으로 개편하고, 신임 실장에 박학규(61) TF 담당 사장을 선임했다.
이재용 회장의 발목을 잡아왔던 ‘사법 리스크’가 해소되고, AI 메모리 반도체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대응 실기(失期)로 불거진 위기론을 딛고 최근 경쟁력을 회복하는 가운데 삼성전자가 핵심 조직을 개편한 것이다. 재계는 삼성의 2인자 교체가 인적 쇄신과 사업 재편의 계기가 될지 주목하고 있다.
◇회사 경쟁력 회복 시점에 퇴진
정 부회장의 퇴진은 연말 인사를 앞두고 갑작스럽게 발표됐다. 정 부회장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진 2017년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이후, 그 대체 역할인 TF 조직을 8년간 이끌어 온 ‘그룹 실세’였다. 거대 그룹의 구심점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 회장을 보좌해 삼성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평가와 함께, 재무 전문가로서 보수적인 경영 판단을 하면서 삼성 위기론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평을 동시에 받아 왔다.
삼성 사정을 잘 아는 재계 관계자는 “정 부회장이 퇴진 시점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해 온 것으로 안다”며 “회사 실적이 좋지 않을 때 떠나는 것보다는 회사를 정상화시켜 놓고 물러나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지금이 적기라고 본 것 같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연말 인사 전에 자리에서 물러나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용퇴 차원”이라고 했다. 정 부회장은 이날부로 퇴임해 일종의 고문 역할인 ‘회장 보좌역’을 맡았다. 서울 서초의 집무실도 바로 비운 것으로 전해졌다.
◇전자 컨트롤타워, 상설 조직으로
삼성전자는 기존에 전자 계열사의 임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 왔던 ‘사업지원TF’도 ‘사업지원실’이라는 상설 조직으로 재편했다. 신임 실장인 박학규 사장은 청주고와 서울대 경영학과, 카이스트 경영과학과 석사 출신이다. 그룹 미래전략실 경영진단팀장을 지낸 재무 전문가로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과 완제품(DX) 부문에서 경영지원실장(CFO)을 각각 역임했다. 빠른 의사 결정과 강한 업무 추진능력을 바탕으로 ‘해결사’란 평가를 받는다.
사업지원실은 전략팀과 경영진단팀, 피플팀의 3팀 체제로 꾸려졌다. 전략팀장에는 그룹 내 전략통으로 삼성SDI 대표와 삼성글로벌리서치 경영진단실장을 역임한 최윤호 사장을 선임했다. 경영진단팀장에는 주창훈 TF 부사장, 피플팀장에는 문희동 TF 부사장을 각각 임명했다. 사업지원실은 그룹 전자계열사 업무를 조율하는 역할로, 삼성전자 내부의 경영진단·피플 등의 조직과는 별개로 움직인다. 사업지원실은 기존 TF 인력 50여 명에, 경영진단실 산하 그룹 담당이었던 2팀 조직을 합해 80명 안팎 규모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은 정규 조직을 신설하고, 조직 곳곳에 흩어져 있던 기능을 한데 모으면서 재무와 감사, 인사 등 계열사 장악력을 한층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삼성전자는 기존 그룹 컨트롤타워였던 미래전략실(미전실)의 부활 차원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구 미전실은 전략팀과 인사지원팀, 법무팀, 커뮤니케이션팀, 경영진단팀, 기획팀, 금융일류화추진팀의 7팀 체제였는데, 이 가운데 일부 기능만을 한 조직에 모았을 뿐 그룹 업무 전체를 관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비(非)전자 계열사는 삼성물산 산하의 ‘EPC 경쟁력강화 TF’, 금융 계열사는 삼성생명 산하의 ‘금융일류화추진 TF’가 담당하고 있다. 삼성에 따르면 이 조직들은 당분간 상설 조직으로 바꾸지 않을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사업지원실 신설은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조직 보강 차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