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서 조여오는 친환경 규제에 산업계가 일제히 ‘숨통을 틔워달라’며 반발하고 있다. 지난 4일 철강·화학·시멘트 등 주요 제조업계는 정부의 탄소 감축 목표가 과도하다며 합리적 수준으로 완화해달라는 내용의 공동 건의문을 냈다. 자동차업계도 무공해차 보급 목표가 비현실적이라며 반발하고 있고, 항공업계도 내년부터 시작되는 친환경 항공유 의무화로 항공료 인상이 불가피하다며 하소연하고 있다.
정부는 조만간 국가 전체의 탄소 배출을 얼마나 줄일지 정하는 큰 그림인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정할 계획인데, 이를 둘러싸고 산업계에서 반발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친환경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하더라도, 정부의 규제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고 산업 경쟁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지원책이 부족하다는 것이 산업계의 토로다.
◇“배출권 구매 비용 5조원“…제조업 8개 협회 긴급 건의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철강협회, 한국화학산업협회, 한국시멘트협회, 대한석유협회, 한국비철금속협회, 한국제지연합회, 한국화학섬유협회 등 8개 업종별 협회는 4일 정부에 ’2035년 NDC‘와 ‘배출권거래제 4차 계획기간(2026~2030년) 할당 계획’을 합리적으로 수립해달라는 공동 건의문을 제출했다.
정부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정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2035년까지 배출가스를 2018년 대비 48%부터 53%, 61%, 65%까지 감축하는 4가지 안이 대상이다. 산업계에선 이 목표가 과할뿐더러, 기업들이 배출권 부족분을 시장에서 추가로 구매해야 하는 부담이 크다고 우려한다.
배출권거래제는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 허용량인 ‘배출권’을 기업에 할당하고, 기업들은 할당된 범위 내에서만 배출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제도다. 만약 배출량이 할당량을 초과하면 부족한 배출권을 시장에서 구매해야 한다. 4차 계획기간부터 배출권 총량이 대폭 줄어들 예정이다. 산업계는 “기업들이 부족한 배출권을 시장에서 추가로 사야 하는데, 그 비용이 천문학적”이라고 토로한다.
실제로 주요 업종별 협회 조사 결과, 4차 계획기간 배출권 추가 구매 부담은 철강 5141만9000톤(t), 정유 1912만2000t, 시멘트 1898만9000t, 석유화학 1028만8000t에 이를 것으로 나타났다. 배출권 가격을 개당 5만원으로 가정하면 4차 계획기간 동안 이 4개 업종에서의 배출권 총 구매 비용은 약 5조원에 달한다.
산업계는 공동 건의문에서 “최근 국내 제조업은 중국발 공급과잉, 주요국 관세 인상, 내수침체 장기화 등으로 수익성 저하와 경영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라며 “정부에서 제시하고 있는 NDC 등은 산업 경쟁력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자동차업계, 항공업계도 비상
자동차업계는 논의되는 NDC에 따라 정부가 제시한 2035년 무공해차 목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는 2035년까지 무공해차를 840만∼980만대 보급해 전체 자동차 중 무공해차 비중을 30∼35%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연합회 등은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사실상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가 전제되어야 하고, 급격한 전환이 부품업계의 구조조정과 고용 감소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또, 중국 전기차의 내수 시장 잠식 등도 문제로 제기된다.
항공업계도 정부가 지난 9월 공식화한 ‘SAF(지속가능항공유)’ 도입 의무화에 긴장하고 있다. SAF는 폐식용유, 생활폐기물 등을 원료로 한 친환경 연료로 기존 화석 연료 대비 최대 80%까지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 정부는 2027년부터 국내 출발 항공편에 SAF를 최소 1% 이상 혼합 사용하도록 의무화하고, 2030년 3~5%, 2035년 10%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SAF 사용을 의무화하며 친환경에 앞장선다는 계획이지만, SAF는 일반 항공유보다 2.5배 정도 비싸다. 연료비가 항공사 전체 비용이 30%를 차지하는 만큼, 항공업계에서는 SAF가 의무화 될 경우 소비자가 부담하게 될 항공료가 비싸질 것으로 우려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SAF 1%’ 기준으로 단거리 이코노미석 가격은 1000~3000원, 미주 노선은 8000원~1만원 정도 오를 것”이라는 입장이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의무 비율이 단계적으로 높아지면 소비자 부담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SAF를 의무화한 유럽에서는 항공사들이 요금을 올리는 사례도 생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