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왼쪽)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한미 관세협상 추가 논의를 마치고 2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는 31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이 사실상 무산됐다. 핵심 쟁점인 3500억달러(약 500조원) 규모 대미 투자 펀드에 대한 한국의 직접 투자 규모를 두고 양국이 여전히 첨예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24일 공개된 싱가포르 ‘스트레이츠 타임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한국 금융시장에 미칠 잠재적인 영향력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며 “인위적인 마감 시한을 정해두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밝혔다. APEC 정상회의 이전의 협상 타결 가능성에 사실상 선을 그은 것이다.

이 대통령은 스트레이츠 타임스 인터뷰에서 “최근 양국 간 경제 협력이 첨단 기술 분야로 확대되면서, 양국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면서도 “다만 한미 간 산업 협력이 우리 국내 산업 공동화를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미국의 제조업 부활을 위해 요구받는 막대한 대미 투자로 인해 국내 투자가 위축될 것을 우려하며,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고위급 ‘무박 방미’에도 빈손 귀국

대미 협상을 총괄하는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이날 미국에서 귀국하며 “APEC 계기 타결을 기대한다면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함께 지난 16일에 이어 엿새 만에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을 다시 만나 ‘무박 3일’ 협상 출장을 감행했지만 별 진전을 보지 못했다. 김 실장은 귀국 직후 “일부 진전이 있었지만 핵심 쟁점에서 양국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APEC 전 협상 타결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도 김 실장은 “(APEC 개막 전 러트닉 상무장관과) 추가로 대면 협상을 할 시간이 없다”며 “APEC은 코앞이고 날은 저물고 있어 APEC 계기 타결을 기대한다면 갈 길이 멀다”고 했다.

귀국 당일인 이날 오전 국정감사에 참석한 산업통상부 김 장관은 “양국 논의의 핵심은 ‘직접 투자’ 규모”라며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를 두고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은 연간 250억달러씩 8년간 총 2000억달러를 직접 투자할 것을 요구하고, 우리 정부는 10년에 걸친 연간 150억달러 이하 투자를 주장한다는 최근 본지 보도에 대해서도 “정확한 숫자를 확인해 줄 순 없지만 유사한 논의가 있었다”고 했다. 직접 투자 액수를 두고 양국 간에 큰 간극이 있음을 사실상 인정한 셈이다.

◇김정관 ‘150억달러 VS 250억달러’ 대립, 사실상 인정

김 장관은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한 ‘상업적 합리성’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투자 프로젝트를 결정할 때 미국과 한국이 협의하는 구조를 만들고, 투자 손실을 한국이 온전히 떠안지 않도록 여러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일각에서 제기된 ‘미국산 대두 수입 확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요구받은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번 APEC 정상회의 기간에 양국이 이견이 큰 쟁점을 뺀 정상 간 합의문만 발표하고, 추후 양해각서(MOU) 체결을 위한 협상을 계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통상 전문가는 “정상회담이라는 큰 모멘텀(추진력)을 잃은 양국 협의가 장기화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산업계가 우려하는 시나리오다.

특히 자동차 업계는 대미 수출에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의 무관세 혜택을 잃은 데 이어, 일본·유럽연합보다 10%포인트 높은 관세(25%)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 장기화하는 걸 우려한다. 현대차·기아는 지난 4월부터 부과된 25% 관세 여파로 지난 2분기 영업이익이 1조6000억원 감소했다. 미국 내 재고가 소진되는 3분기에는 손실 규모가 더욱 커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