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의 5주기를 맞은 올해, 이재용 회장 등 삼성가 유족들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이 한국을 넘어 세계로 간다. 다음 달부터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 영국박물관 등으로 가 ‘K예술’의 정수를 알린다.
해외 전시에 나서는 작품들은 이건희 회장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국보·보물급 지정 문화재 60건을 비롯해 김환기와 박수근, 클로드 모네, 파블로 피카소 등 국내외 작가의 걸작 2만3000여 점 가운데 주요작 200여 점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된 이 작품들은 앞서 올 2월까지 4년여간 전국 미술관·박물관을 한 바퀴 돌며 누적 349만명의 관객을 매료시켰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이중섭의 ‘황소’ 등이 포함된 이건희 회장의 기증 작품들은 감정가만 3조원에, 시가로는 10조원이 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건희 컬렉션은 우리 문화계에 여러 가지로 긍정적인 기여를 했고, 최근 관람객 500만명을 돌파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이른바 ‘국중박 신드롬’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건희의 유산은 서울과 지방의 ‘문화 격차’ 해소의 물꼬를 텄다. 유족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유산 대부분을 기증하면서도 제주(이중섭미술관), 강원(박수근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대구시립미술관 등 전국 각 지역에도 작품을 고루 기증했다. “누구나 일상적인 생활에서 미술을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국가의 문화적 역량을 꽃피울 수 있다”고 강조해왔던 이 선대 회장의 뜻을 유족이 존중한 결과다.
주요 작품을 뽑아 2022년부터 올해 2월까지 전국 순회 특별 전시도 했다. 이건희 컬렉션이 가는 곳마다 지방 미술·박물관은 최고 관람객 기록을 새로 썼다. 3개월여 전시 기간에만 광주박물관에는 31만명, 대구박물관은 26만명, 청주박물관에는 17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전시 개막 당일 수백 명의 관객이 오픈런을 하는, 지방 미술관 역사상 상상하기 어려웠던 광경이 펼쳐졌다”고 했다. 지방 순회 전시 일정을 앞당기려는 지역 간 경쟁이 벌어지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빨리 공개하라는 민원이 빗발칠 정도였다.
오랜 숙제였던 지역 미술관·박물관의 시설을 개선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보험가액만 수백억 원인 고가 작품을 감당하려면 일정 온도와 습도가 24시간 조절되는 설비가 필수인데, ‘이건희 컬렉션’이 오자 그간 시큰둥했던 지자체로부터 예산을 일사천리로 지원받게 된 것이다.
지방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효과도 컸다. 울산시립미술관은 이건희 전시를 진행한 3개월간 원도심 방문객이 475% 늘었다고 발표했다. 전북도립미술관도 전시 기간 도외(道外) 관람객 비율이 매월 평균 10% 이상을 차지하는 이례적인 성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올해 개관 이래 첫 500만 관객을 돌파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인기에도, 이건희 컬렉션 대부분인 2만1600여 점이 기증된 효과가 컸다.
다음 달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를 시작으로 이건희의 유산은 해외 순회를 시작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전시다. 체이스 로빈슨 국립아시아미술관장은 “이건희 회장은 선견지명을 지녔던 수집가”라며 “한국 역사상 가장 뜻깊은 기부 중 하나인 이 문화유산들의 이야기를 해외에 전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내년 3월과 9월에 각각 미국 시카고미술관, 런던 영국박물관에 전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