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2024.1.11/뉴스1

재계 8위 HD현대그룹이 ‘3세 경영’ 시대를 맞는다. HD현대그룹은 17일 사장단 인사를 단행하고 ‘그룹 지주사 HD현대의 정기선(43) 수석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한다’고 발표했다. 정 신임 회장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손자이자, HD현대그룹 최대 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이다.

(왼쪽부터)정기선 회장, 권오갑 명예회장, 이상균 부회장, 조영철 부회장

이날 인사를 통해 HD현대는 37년간 이어진 전문 경영인 체제에서 창립자 일가의 3세 경영으로 전환한다. HD현대는 정 이사장이 1988년 정계에 진출하며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전문 경영인 체제를 유지해 왔다. 1978년 HD현대중공업 신입 사원에서 시작해 ‘샐러리맨 신화’를 쓰며 2014년부터 그룹 경영을 총괄해 온 권오갑 회장은 상근 명예회장으로 물러난다. 총수 일가가 아닌 공채 출신이 명예회장 예우를 받는 건 이례적이다.

이번 인사는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 조선소 디지털 혁신 등 미래 성장 동력 확보가 절실한 시점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하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HD현대 관계자는 “12년간 그룹 성장을 이끌어 온 권 회장이 용퇴를 결심함에 따라 신구 경영진의 조화로운 전환을 위한 최적의 시점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HD현대그룹은 조선 부문, 정유 부문, 건설기계 부문에 걸쳐 계열사를 32곳 거느리고 있으며, 자산 총액은 약 88조7200억원에 이른다. 지주사인 HD현대를 정점으로 그 아래에 핵심 사업 부문별 중간 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조선), HD현대오일뱅크(정유·에너지), HD현대사이트솔루션(건설기계·산업차량)을 두고 있다.

정 신임 회장은 국내 재계에선 비교적 이른 43세에 회장에 선임됐다. 과거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1981년 29세 때, LG그룹 구광모 회장이 2018년 40세에 회장에 오른 바 있다. 정 회장은 2023년 부회장, 작년 11월 수석부회장으로 선임된 데 이어 11개월 만에 회장에 올랐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땄다. 2009년 현대중공업 기획실 재무팀으로 입사했고 이후 HD현대 경영지원실장, HD현대중공업 선박영업 대표, HD현대마린솔루션 대표이사 등을 맡았다.

회장에 오르며 그룹 경영을 맡게 됐지만 향후 안정적인 경영을 위한 지분 확보는 과제다. 정 회장의 HD현대 지분율은 6.12%, 부친 정몽준 이사장이 26.6%를 보유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낮은 지분율을 해소하며 경영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그룹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혁신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정 신임 회장의 과제다.

정 신임 회장은 수석부회장 시절 인공지능(AI) 접목을 통한 사업 혁신을 통해 그룹의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 왔다. 이제 총수 반열에 오르면서 글로벌 경영 행보도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그룹 주력인 조선 사업은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과 협력 확대를 모색하면서 인도를 포함한 글로벌 생산 거점 다각화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 신임 회장은 국내 비(非)IT·가전 기업 중에서는 최초로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 CES의 2024년 기조연설을 맡아 AI 기반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특히 글로벌 AI 기술 기업과의 협력도 주도했다. 미국 팔란티어(Palantir)와 국내 기업 중 가장 먼저 협업을 시작할 때 그의 역할이 컸다. 양사는 ‘미래 첨단 조선소(FOS)’ ‘무인 수상정’ 등을 공동 개발하고 있다.

한편 이번 인사에서는 이상균 HD현대중공업 사장과 조영철 HD현대사이트솔루션 사장이 각각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조 부회장은 그룹 지주사인 HD현대 새 대표이사로도 내정돼 정 회장과 함께 공동 대표이사를 맡을 예정이다. 금석호 HD현대중공업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해 이상균 부회장과 함께 공동 대표를 맡을 예정이다. HD현대중공업 주원호 부사장은 미포 및 특수선 담당 사장으로 승진한다.

12월 1일 HD현대중공업으로 통합되는 HD현대미포의 김형관 사장은 조선 부문 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로 옮긴다. 이 회사 대표이사를 겸하는 정기선 회장과 공동 대표를 맡는다. 기존 김성준 대표는 사장으로 승진해 HD현대마린솔루션 대표이사에 내정됐다. 내년 1월 1일 통합되는 HD건설기계 대표에는 문재영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 내정됐고, HD현대사이트솔루션 대표에는 송희준 부사장이 내정됐다. HD현대로보틱스 김완수 대표는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날 내정자들은 향후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거쳐 정식 선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