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P 연합뉴스 지난 8월 26일 미 필라델피아 한화필리조선소에서 다목적 선박 ‘스테이트 오브 메인(State of Maine)’호 명명식이 열렸다. 태극기와 성조기 사이로 보이는 선박이 미 해사청(MARAD)이 발주한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다. 한화그룹은 ‘마스가’ 프로젝트의 출발을 알리는 이날 행사에서 향후 이 조선소에 50억달러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중국 정부가 14일 한화그룹 조선·해운 분야 미국 자회사만을 특정해 제재 대상에 올린 것은 매우 이례적인 조치다. 과거 중국은 사드(THAAD) 배치 등 한국과 외교 마찰이 극심했던 시기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비공식적으로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압박했다. 한국 특정 기업을 명시적으로 제재 목록에 올린 건 전례가 드물다. 이번 조치는 미 조선업 복원을 위한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포함한 한미 협력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내에선 한국 외에도 이탈리아, 호주 등이 현지 조선소를 운영하고 있지만, 중국은 유독 한국 한화만을 제재했다. 글로벌 조선 시장을 사실상 한중이 양분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을 본보기 삼아 다른 외국 기업들에 미국과의 협력에 대한 경고를 보내려는 전략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현지 조선 역량 쌓는 한화 계열사만 겨냥

이번에 제재 대상이 된 기업들은 한화그룹의 미국 내 조선·해운 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법인들이다. 한화 필리조선소는 한화그룹이 지난해 인수한 미 필라델피아 소재 조선소다. 한화는 이곳을 중심으로 미국 내 선박 건조 역량을 확대할 계획이다. 한화는 지난 8월 말 이재명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50억달러를 투자해 현재 연 1~1.5척 수준인 선박 건조 능력을 연 20척까지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화쉬핑은 선박 발주와 운영을 맡는다. 한화오션USA인터내셔널, 한화쉬핑홀딩스, HS USA홀딩스는 한화의 미국 내 사업을 관리하고 투자하는 법인들이다.

한화는 이미 현지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 7~8월 한화쉬핑(한화해운)을 통해 필리조선소에 배 12척을 발주했다. 이 중 2척은 한화오션 거제조선소로 재발주됐다. 대부분의 건조 작업을 마치면 필리조선소로 옮겨져 최종 완성될 예정이다. 한화는 이를 통해 협력사 유치, 현지 인력 양성, 선박 건조 능력 제고라는 목표를 이룰 생각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번 제재를 통해 한화가 미국에 구축하려는 해운·조선 밸류체인을 타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날 중국 상무부는 한화오션 미국 자회사들이 미국 정부의 ‘대중 무역법 301조 조사‘에 협조하고 지지해 중국의 주권과 안보, 이익에 해를 끼쳤다는 점을 제재 명분으로 내세웠다. 미 무역대표부(USTR)가 지난 3월 현지에서 개최한 공청회에서 한화 측이 미국의 대중 제재에 동조하는 의견을 제출한 것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화쉬핑은 부사장 명의 의견서에서 “중국과 같이 적대적인 이해관계에 놓인 조선소에서 건조된 선박에 수수료를 부과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밝히며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민간 기업으로서 현지 사업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이 이를 자국에 대한 위해 행위로 규정하고 보복 조치를 취한 것은, 국제 무역 규범과 민간 기업의 자율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조선 업계 “실질적 타격은 작지만 예의 주시”

정부와 조선 업계는 중국의 제재가 미칠 여파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한화가 미 현지 조선·해운 사업을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인 데다 미국 내 사업은 중국과 직접 거래할 일이 거의 없어 당장 실질적인 영향이 크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다만 중국이 제재 대상을 미국 현지 자회사뿐 아니라 한화오션까지 확대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은 중국 내 자체 선박 블록(부분 선체) 공장에서 제작한 블록을 가져다 최종 조립하는 방식으로 선박을 만들어왔다. 제재가 여기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생산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이날 한화오션 주가도 오전 소폭 상승을 유지하다가 중국 제재 발표 이후 급락, 5.76%(6300원) 하락한 10만3100원으로 마감했다.

업계 관계자는 “필리조선소에서 거제로 재발주한 2척은 중국 부품을 안 쓰는 방식으로 문제의 소지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화오션은 “중국 정부의 발표 내용을 인지하고 있으며, 해당 조치가 미치는 사업적 영향에 대해 면밀히 검토 중”이라고 했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중국의 이번 제재는 실제 타격을 입히기보단 미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선언적인 행위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며 “중국 내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고 여러 피해 시나리오를 검토할 방침”이라고 했다.

☞美 무역법 301조와 입항 수수료

미 ‘무역법 301조’는 다른 나라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조사해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미국은 이를 근거로 중국 해운·조선업이 미국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지난 14일부터 자국에 입항하는 중국 선박에 t당 최대 50달러의 입항 수수료를 부과했다. 중국도 같은 날부터 미국 선박에 보복 조치를 취하면서 갈등이 격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