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송현동의 열린송현녹지광장에 거대한 꽈배기 형태의 철강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품명은 ‘휴머나이즈 월(Humanise Wall)’. 영국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인 토머스 헤더윅(55)이 제작한 높이 16m, 폭 90m의 초대형 조형물이다. 철판 1428장을 유연하게 비틀어 ‘조각보’처럼 이어 붙였다.
헤더윅은 이날 송현광장에서 개막한 국제 도시 건축 행사 ‘제5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으로, 행사 대표 작품인 ‘휴머나이즈 월’ 제작도 맡았다.
그와 함께 이 초대형 철강 조형물을 만든 숨은 조력자는 바로 장세욱(63) 동국제강그룹 부회장이다. 사실 헤더윅은 이 작품을 천(fabric)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헤더윅은 “휴머나이즈 월을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초청장이라고 생각했다”며 “멀리서 아이가 봤을 때 ‘와, 엄마 저게 뭐야’라면서 호기심을 갖고 마음 편히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을 원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한국의 전통 방식인 ‘천 조각보’를 염두에 뒀다고 한다. 고민은 ‘내구성’이었다. 천은 장기간 외부에 노출되면 바람에 찢어지거나, 빛에 바래고, 눈과 비에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을 ‘철(steel)’로 바꾼 것은 장세욱 부회장의 아이디어였다. 장 부회장은 평소 헤더윅의 건축학 강의를 온라인으로 수강할 만큼 그의 개인적인 팬(fan)이었다고 한다. 그는 “내가 만드는 철로 헤더윅이 건축을 하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했다.
지난 2월 장 부회장은 헤더윅의 온라인 강의를 듣다가, 우연히 잘 아는 예술계 인사의 얼굴을 화면에서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곧장 문자를 보냈고, 헤더윅 스튜디오와도 연락이 닿았다. 마침 헤더윅이 ‘휴머나이즈 월’ 소재로 골머리를 앓던 때였다.
장 부회장은 회사의 최고급 컬러 강판인 ‘럭스틸’의 카탈로그와 샘플을 들고 헤더윅 스튜디오를 만났다. 한 달여간 적극적으로 소통한 결과, 헤더윅이 장 부회장을 직접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본인은 직선보다 곡선을 선호하고, 다양한 색깔을 쓸 수 있어야 하고, 친환경적이며, 오래가야 한다는 조건들을 내세웠다고 한다.
지난 4월 장 부회장은 헤더윅과의 첫 대면에서 럭스틸 샘플을 보여줬다. 종이접기하듯 구부릴 수 있고, 2만개 이상의 색상 구현이 가능하고, 30년간 품질이 유지된다는 점을 차례차례 설명했다. 헤더윅은 이 순간을 훗날 인터뷰에서 “마치 천사(angel)가 날아온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장 부회장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에 큰 열정을 느꼈다”고도 했다.
헤더윅과 의기투합한 장 부회장은 3억원어치의 컬러 강판을 작품에 전량 후원하기로 했다. 다만 철판 1428장을 마치 ‘비늘’ 같은 완벽한 곡선으로, 또 모두 다른 형태로 구현하는 것은 회사 측에도 큰 도전이었다. 꽈배기처럼 휘어진 구조라 평행사변형, 사다리꼴 등 모양도 제각각인 데다 고도의 정밀 가공, 절단 기술 역시 필요했다. 장 부회장은 설계부터 디자인, 생산, 가공에 이르기까지 실무진과 매주 회의를 이어가며 결국 헤더윅이 구상한 모습을 완성해 냈다.
헤더윅은 “정말 놀랍고 자랑스럽다”며 “이 소재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여 보고 싶다”고 했다. 장 부회장도 “서로의 에너지와 열정을 확인하며 헤더윅과 깊은 파트너십이 형성됐다”며 “럭스틸을 활용한 글로벌 랜드마크를 더 많이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