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최대 수출품인 자동차는 늘 ‘반도체 리스크’를 안고 있다. 내연차가 전기차, 자율 주행차 같은 바퀴 달린 ‘전자 기기’로 변모하면서 반도체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지만, 외국산 반도체 의존도가 무려 95%에 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세계 100대 차량용 반도체 기업 중 국내 기업은 고작 5곳, 삼성전자·서울반도체·SK하이닉스·텔레칩스·LX세미콘뿐이다. 시장 점유율은 고작 3%대 초반. 세계 각국이 ‘자국 우선주의’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공급망이 갖춰지지 않으면 한국 자동차 산업은 언제든 멈춰 설 수 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동차 부품 세계 6위 기업인 현대모비스가 29일 ‘차량용 반도체 포럼’을 열었다. 화두는 ‘자립’이었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과 함께 국산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경기도 판교의 한 호텔에서 열린 포럼에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LX세미콘, SK키파운드리, 텔레칩스, 퓨리오사AI 등 한국 반도체 산업을 대표하는 20여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들이 모였다. 완성차와 반도체 기업이 민간 주도로 모여 차량용 반도체 산업의 공동 대응책을 논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행사를 연 이규석 현대모비스 사장은 2021년 코로나 때 ‘차량용 반도체 대란(大亂)’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현대차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공장 가동을 멈추거나 일부 기능을 뺀 ‘깡통차’를 출고해야 했다. 당시 현대차 구매본부장이었던 이 사장은 “당시의 어려움을 기억한다”며 “외산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인 만큼 힘을 합쳐 국산화를 이뤄내자”고 했다.
◇車 반도체 95% 외산 의존
국내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가 미약한 것은 높은 기술 및 품질 인증이라는 진입 장벽 때문이다. 인명과 직결되는 만큼 혹독한 주행 환경을 견딜 수 있는 내구성과 신뢰성이 필수적이다. 일반 반도체와 달리 다품종 소량 생산 구조라 사업성 확보도 쉽지 않다. 인피니언(독일), NXP(네덜란드), ST마이크로(스위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미국), 르네사스(일본) 같은 전통의 ‘톱5’가 깊은 해자(垓字)를 구축한 채 사실상 시장을 장악하는 이유다.
현대모비스는 ‘후발 주자’다. 2021년 현대오트론으로부터 차량용 반도체 사업을 인수한 이후, 자체 설계한 반도체를 올해부터 외부 파운드리를 통해 전원, 구동, 통신, 센서 등 16종의 반도체 2000만개를 양산할 계획이다. 배터리 관리 시스템, 통신용 반도체 등 11종의 차세대 반도체는 ‘3년 내 개발 완료’가 목표다. 단독 개발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그래서 반도체 업계에 동참을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현대차, “국산 반도체 채용 2배로 확대”
현대모비스는 포럼을 계기로 반도체 기업들과의 협력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현대모비스는 국내 팹리스의 차량용 반도체 사업 전환을 돕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현대차는 든든한 구매처가 되겠다는 것이다.
현대차 전자부품 구매 담당 임원은 “지난해 8조3000억원이었던 반도체 구매 금액이 2030년엔 16조원으로 커질 전망인데 해외 반도체 의존율이 95~97%에 달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5% 수준인 반도체 국산화 채용을 2030년엔 10%로 늘리겠다”고 했다.
현대모비스는 차량용 반도체를 표준화해 사용량을 더 늘리겠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현대모비스는 이미 국내 팹리스인 글로벌테크놀러지, 동운아나텍과 협력해 차량용 반도체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두 회사는 TV와 모바일용 반도체 전문 설계 업체지만 현대모비스와의 공동 개발을 통해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런 생태계를 구축해 미래 먹거리인 로봇 분야까지 아우르겠다는 포석을 갖고 있다. 박철홍 현대모비스 전무는 “차량용 반도체는 높은 품질과 신뢰성을 충족한 만큼 로보틱스는 물론 미래 모빌리티 전 사업 분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