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말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직후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협상이 호혜적인 결과를 도출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서면 합의 없이도 구두 합의가 충분히 견고하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후 미국이 보낸 양해 각서(MOU)에 한국의 당초 이해와 다른 ‘현금 조달’ 내용이 포함된 것이 알려지면서 초기 평가와 괴리가 드러났다. 지난 25일 이재명 대통령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미국의 요구에 대해 감당할 수 있는 조건, 즉 ‘상업적 합리성’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의 요구에 미국은 요지부동을 넘어,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 시각) 일본과 한국을 동시에 언급하며, 한국과 협상에서 거론되는 3500억달러와 일본의 5500억달러를 “우리가 받는 돈이자 선불”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 말 한미가 합의한 대로 차·부품 관세를 15%로 내리려면, 일본과 같이 대미 투자 펀드 대부분을 트럼프 임기 내 현금으로 조달하는 MOU에 서명하라고 재차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금액이 관세 인하를 약속한 대가라는 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 장관도 한국에 ‘일본과 동일한 형태의 합의’를 강력히 요구하며 당초 합의된 3500억달러보다 규모를 더 늘리는 쪽으로 압박하고 있다고 WSJ는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러트닉은 투자 자금 대부분을 현금으로 조달해 달라는 뜻을 한국 측에 전했고, 한국은 ‘백악관이 골대를 움직이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며 양국 후속 협의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양국의 이견이 갈수록 커지는 모양새다.
◇美도 강대강 압박 전술
우리 정부는 해당 보도에 대해 ‘투자 규모 증액을 요구받은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미국이 양해 각서 문안 수정 요구에 응하지 않아, 후속 협의가 길어진다는 점은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러트닉 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과 회담하며 “한국과 일본은 기초 경제 체력이 다르다”고 설득해왔다. 하지만 WSJ는 “트럼프 행정부가 원하는 대로 한국과 무역 합의를 타결해야 미국이 다른 나라와 협상을 체결할 동력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 양보하는 모양새가 되면, 미국의 과도한 요구에 불만을 가진 다른 나라들도 협상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회의를 기점으로 협의가 마무리될 수 있도록 협상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과의 통상 협상 불씨가 안보 등 다른 분야로 번질 수 있다”며 “최대한 협상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분위기를 전환할 카드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약품 등 관세 전선 확대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추가 품목 관세 부과를 잇따라 발표했다. 이날 그가 ‘내달 1일부터 새로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한 품목은 의약품(100%)과 중·대형 트럭(25%), 주방 수납장 및 욕실 세면대(50%), 가구 완제품(30%) 등이다. 이 가운데 의약품의 경우 지난해 한국의 대미 수출액 규모가 39억7000만달러(약 5조6000억원)에 달한다.
한국은 협상 지연으로 인해 고율의 자동차 관세(25%) 부담을 안고 있다. 반면 일본과 유럽연합(EU)은 15%를 적용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의약품 등에 대한 추가 관세까지 우려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우리 정부는 7월 말 한미 관세 협상에서 의약품·반도체 품목에서 최혜국 대우를 보장받기로 구두로 합의했다. 미국에서 가장 낮은 관세를 부과받는 나라와 똑같은 혜택을 우리도 약속받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3500억달러 투자 후속 협의가 길어지면서 이를 명문화하지는 못한 상태다. 일본은 의약품·반도체 관세에서 최혜국 대우를 보장받는 것으로 미국과 합의하고 명문화도 마쳤다.
미국의 관세 전선이 반도체와 핵심 광물 등으로 더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 상무부가 의약품과 비슷한 시기에 관세 부과를 검토하기 시작한 품목들이기 때문이다. WSJ는 “미 행정부가 수입 반도체와 국내 생산 반도체 비율을 1대1로 맞추는 것을 의무화하고, 이를 어기면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