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 후속 협의의 최대 난관으로 꼽히는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 패키지’와 관련해,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24일(현지 시각) 뉴욕에서 “한미 무제한 통화스와프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며 “이 문제가 해결돼도 ‘상업적 합리성’ 같은 충분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김 실장의 브리핑은 대미 협상에서 한국의 어려운 입장을 설명하고, 사실상 협상의 마지노선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이재명 대통령의 방미에 수행한 김 실장은 기자간담회를 열어 이재명 대통령의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면담 및 협상 현안에 대해 설명했다. 김 실장은 3500억달러 대미 투자와 관련해 미국이 보내온 양해각서(MOU) 문건에 대해 “(우리의 이해와) 판이하게 다른 내용이 있었다”고 했다. 우리 정부는 미국에 대한 일부 투자와 대출·보증을 합친 액수가 최대 3500억달러가 될 수 있다는 취지로 이해하고 설명해왔지만, 미국은 3500억달러를 직접 지분 투자(에쿼티)에 가깝게 주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우리가 조달하는 자금의 성격을 ‘직접 투자’가 아닌 대출·보증·투자 등으로 구분해 규정하고, 투자가 최대한 ‘대출’에 가까운 속성을 갖도록 문안을 협상 중이나 미국이 응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김 실장은 미국의 요구에 대해 “우리 외환 시장에 미칠 충격이 눈에 들어왔다”며 “이 경우 무제한 통화스와프는 ‘필요조건’이 된다”고 했다. 3500억달러가 우리의 외환보유고(4100억달러)에 육박하는 규모인 만큼, 통화스와프 같은 환율 안전 장치는 필수라는 의미다.
◇통화스와프·상업적 합리성, 필요·충분조건
김 실장은 “통화스와프 문제가 해결됐다고 3500억달러 투자가 미 측 요구대로 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통화스와프는 필요조건일 뿐, 협상 타결을 위한 다른 ‘충분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의미다. 이재명 대통령이 ‘상업적 합리성’을 거론한 데 이어 이날 김 실장도 이를 다시 언급했다.
상업적 합리성의 첫 관문은 대미 투자의 수익 분배 이슈다. 김 실장은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초기 협상용인지 강한 내용의 초안을 보냈다”며 “우리 국익에 맞는 방향으로 조정 중”이라고 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당초 미국은 투자 이익을 한·미가 1대9로 나눌 것을 요구했으나 우리 정부는 원금이 회수될 때까지라도 한국 9, 미국 1로 가자고 제안해 조율을 시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원금이 회수될 때까지는 5대5, 원금 회수 후에는 미국이 이익 90%를 가져가는 것으로 최종 합의한 일본 방식에 비하면 파격적이다. 다만 미국이 한국 방안을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김 실장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투자로 원금 손실이 났을 때의 처리 방법도 난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상식적으로 큰 이익이 기대되는 프로젝트라면 미국이 자국 자금으로 투자하고 이윤도 독점할 것”이라며 “투자로 손실이 났을 경우 한국이 손실금을 모두 떠안지 않도록 미 정부의 보증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통상 전문가들은 어디에, 얼마를 투자할지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나, 미국이 요구하면 두 달 내 자금을 송금할 의무를 일방적으로 지는 건 너무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투자 당사자가 이익이 기대되는 분야에 합리적 금액을 투자하기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그에 비례한 이익 분배도 이뤄지는 게 상식”이라며 “미국이 우리에게는 자금만 요구하고 권한은 하나도 주지 않는 건 너무 일방적”이라고 했다.
◇車관세·알래스카 압박 계속
우리 정부는 “협상 시한 때문에 원칙을 훼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이날 미국은 일본에 이어 유럽연합에도 차·부품 관세를 27.5%에서 15%로 인하하고 이를 8월 1일 수출분부터 소급 적용한다고 밝혔다. 대미 수입차 시장을 두고 일본, EU 기업과 경쟁하는 한국 자동차 기업들의 부담은 더 커질 전망이다.
또 이날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부 장관은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송유관 건설 사업과 관련해 “한·일 등 여러 아시아 기업들과 (사업 참여를) 협의 중”이라며 프로젝트에 자본을 댈 주체 역시 “미국과 아시아의 기업”이라고 했다. 당초 알래스카산 LNG를 구매해달라던 미국이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재차 요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