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산업용 전기 요금이 주택용 요금의 115% 선까지 급등했습니다. 정치적 표(票)만 계산해 산업용 전기 요금만 계속 올리면 제조업·IT 기업들은 한국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조홍종 단국대 교수)

민간 에너지 싱크탱크인 전력산업연구회가 24일 서울에서 개최한 정책 세미나에서 나온 경고다. 학계와 산업계 관계자 100여 명이 모인 세미나 주제는 ‘기업 경쟁력 붕괴시키는 산업용 전기 요금, 대안은 무엇인가’였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주택용 전기 요금은 인상폭을 최소화하고 최근 3년 반 동안 산업용 전기 요금을 무려 70%나 올렸다”며 “이런 ‘정치적 결정‘이 한국 제조업 경쟁력을 위협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주택용 전기 요금보다 쌌던 산업용 전기 요금은 2022년부터 3년간 일곱 번 연속 인상돼 주택용보다 갈수록 비싸지고 있다. 올 상반기 산업용 전기 요금은 ㎾h(킬로와트시)당 179.23원으로 주택용 요금(155.52원)보다 약 15% 높았다.

4년 전만 해도 미국·중국의 산업용 전기 요금이 한국보다 비쌌지만 이제는 역전됐다. 작년 10월 말 기준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h(메가와트시)당 122.1달러로 미국의 전기 요금 80.5달러에 비해 51.7%나 비쌌다. 중국의 전기 요금도 ㎿h당 60~80달러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경쟁국들과 달리 주택용 대비 산업용 전기 요금만 계속 오르면 우리 제조업이 버틸 수가 없다”며 “높은 에너지 비용으로 산업 경쟁력이 후퇴한 유럽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픽=양인성

◇美보다 50% 비싼 산업용 전기료… “한국, 유럽의 실패 닮아간다”

24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력산업연구회 세미나에선 “급등한 산업용 전기 요금 때문에 산업 경쟁력이 붕괴하고 생산 기지가 해외로 이탈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랐다. 특히 중국발 공급 쇼크로 경쟁력이 급격히 추락한 석유화학과 철강 등 ‘전력 다소비 업종’은 심각한 위기 국면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전우영 교수는 “중국에 추격당하고 있는 석유화학 산업은 한계에 놓여 있다”며 “에너지 집약적인 제조업에서 강점을 가진 한국은 핵심 수출 경쟁력이 약해지는 위기 상황”이라고 했다.

24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서울에서 ‘기업 경쟁력 붕괴시키는 산업용 전기 요금, 대안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전력산업연구회 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패널 토론에서 좌장을 맡은 손양훈(왼쪽 넷째) 인천대 명예교수는 “한국은 산업용 전기 요금이 저렴한 게 경쟁력이었는데 그 강점이 사라졌다”고 했다. 다른 전문가들도 “급등한 산업용 전기 요금 때문에 산업의 경쟁력이 붕괴하거나, 생산 기지가 해외로 이탈할 수 있다”고 잇따라 경고했다. /장경식 기자

지난 3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철강과 화학 등 전기 요금 민감 업종에서 지난해 낸 전기 요금은 2년 만에 약 36% 늘어났다”고 밝혔다. 경총은 “업계는 고효율 전력 설비를 도입해 대응하고 있지만 제품 가격 인상, 설비 가동 중단과 축소, 작업 시간 변경 등이 불가피해 현장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산업계가 특히 우려하는 건 한전의 전기 요금 인상이 대기업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2022년 10월에는 전체 전기 요금을 올리면서 대기업 요금을 추가로 인상했고, 2023년 11월에는 대기업 요금만 별도로 올렸다. 지난해 10월에는 중소기업 요금을 5.2% 올리면서 대기업 요금은 10.2% 올렸다. 그 여파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제철 등 전기를 가장 많이 쓴 기업 10곳은 2024년 추가로 부담한 전기 요금이 무려 1조1105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래픽=이진영

◇“전기 多소비 석화·철강, 이대로면 무너진다”

“높은 에너지 비용으로 산업 경쟁력이 무너진 유럽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지난해 내놓은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에서 “높은 에너지 비용과 과도한 규제가 유럽 경기 침체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철강협회 남정임 실장은 이 보고서가 ‘유럽의 반성문’이라고 했다. 남 실장은 “유럽은 탈탄소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그로 인한 높은 에너지 비용 탓에 GDP가 하락했다”며 “글로벌 공급 과잉과 탄소 중립 부담에 산업용 전기 요금 부담까지 더해지면 우리 철강 업계의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했다.

최근 크게 오른 산업용 전기 요금을 이기지 못한 일부 기업은 결국 전력 직구, 자가 발전 등 자구책을 마련할 정도로 사정이 어렵다. LG화학은 지난 6월 한전을 거치지 않고 전기를 사는 ‘전력 직접 구매’ 제도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삼성전기·한화솔루션 등 다른 기업들도 전력 직구를 검토 중이다. 최한주 한국수자원공사 경영연구소 박사는 “수자원공사도 정수 과정 등에서 내는 전기 요금이 작년까지 3년간 1188억원 늘었다”며 “10년째 동결된 수도 요금과 달리 산업용 전기 요금은 크게 올라 수도관 교체와 정수장 첨단화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정부의 재생에너지 확대 기조에 따라 전기 요금은 인상 요인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산업계에선 “결국 기업들의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선거를 의식한 포퓰리즘 탓에 결국은 만만한 기업에 부담을 떠넘기는 구조가 더 굳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1970~80년대만 해도 산업 육성을 위해 주택용 요금의 절반 수준으로 책정됐던 산업용 요금은 이제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손양훈 인천대 명예교수는 “한전 독점 체계에서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가격만 올라 소비자 선택권만 침해됐다”며 “주택용 요금은 표로 연결되니 만만한 산업용 요금을 올린 것 아니냐”고 말했다.

◇“독립적인 요금 결정 기구 만들어야”

지금의 전기 요금 결정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박종배 건국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현재 전기 요금은 물가 당국과 전력 당국이 협의하는 식으로 정하고 있지만 이 절차를 끊어내야 한다”며 “전기 요금을 독립적으로 정할 수 있는 전기위원회 산하 전력감독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성봉 전력산업연구회 회장은 “산업용 전기 요금이 4년도 안 돼 70%나 올라 산업계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출범하면서 급격한 정책 전환이 이뤄지고 재생에너지 비중이 크게 늘어나면 산업계의 부담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