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 25일(현지시간) 미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러트닉 장관은 지난 7월 30일 합의한 한국과 미국 간 무역협상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 측 인사로 알려져 있다. /미국 백악관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11일(현지 시각) 한국에 대해 “(관세) 협정을 수용하거나 관세를 내야 한다”며 “유연함은 없다”고 말했다. 전날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미(對美) 관세 협상을 두고 “미국의 일방적인 관세 증액에 방어하러 간 것”이라며 “이익이 되지 않는 서명은 할 수 없다”고 한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을 반박하며 한국을 압박한 것이다. 이에 맞서 대통령실은 12일 “정부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협상해 나갈 것”이라며 “합리성이나 공정성을 벗어난 협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냈다.

그래픽=김현국

대미 관세 협상이 교착상태인 가운데, 한미 간 협상 기류가 급변하고 있다. 특히 미 이민 당국이 조지아주(州)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에서 한국인 파견자 317명을 구금하는 사건까지 더해져, 한미 간 공방이 격화하며 협상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11일(현지 시각) 미 CNBC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관세) 협정을 수용하거나 관세를 내야 한다”며 “유연함은 없다”고 말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美 러트닉 “유연함은 없다”

러트닉 장관은 11일 미 CNBC 인터뷰에서 한국인 구금 사태로 협상이 위태로워졌는지 묻는 질문에 “한국 대통령은 백악관에 와서 우리와 무역에 관해 논의하지 않은 것을 알 텐데, 그것은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한국은 일본과의 합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연함은 없다”고 말했다. 러트닉의 발언은 ‘한국도 일본처럼 미국과 합의하라. 안 그러면 상호 관세를 당초 합의한 15%에서 기존 25%로 다시 올릴 수 있다’는 경고성 발언으로 풀이된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일본은 지난 4일 미국과의 무역 합의를 공식 이행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한국은 아직 문서화된 합의문에 서명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외환 보유고의 84%에 이르는 ‘3500억달러(약 486조원) 대미 투자 펀드’를 둘러싸고 미국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게 핵심 이유로 분석된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소규모 협상단을 꾸려 지난 10일 뉴욕을 방문했지만, 미국과 입장 차를 좁히는 데는 어려움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대미 투자 펀드 협조 압박

한미 양국은 대미 투자 펀드의 자금 운용·집행, 투자 분야, 수익 분배 등 쟁점마다 이견이 큰 상황이다. 자금 운용과 집행의 경우 한국은 직접 투자와 대출·보증 등이 망라된 ‘금융 패키지’ 방식을, 미국은 한국의 투자금이 즉시 현지 사업으로 이어지는 ‘직접 투자’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투자 분야도 한국은 배터리·반도체 등 전략 산업을, 미국은 자국이 원하는 사업을 원한다. 미국은 대미 투자 펀드 수익의 90%를 자기들이 챙기는 ‘일본식 수익 모델’을 요구하지만 한국은 반발하고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의 성향을 보면, 미국이 원하는 대미 투자 펀드 모델을 한국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주한 미군 감축과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 안보 분야에 대한 압박에도 힘을 실을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생한 ‘한국인 구금 사태’가 대미 협상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트닉 장관은 이날 공개된 미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민을 원하거나 근로자를 데려오고 싶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벌어진 구금 사태의 책임을 한국에 돌린 것이다. 이에 대해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날 인천국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과의 협상은 이제 ‘뉴노멀 시대’를 맞았다”며 “매번 그 기준이 달라지고 끊임없이 협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장은 “한국인 수백 명이 구금되는 사태까지 벌어지니, 정부도 ‘굳이 저(低)자세로 나갈 이유는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