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 업계 최초로 부자(父子)가 ‘대한민국 명장’이 된 고민철(왼쪽) 명장과 아버지 고윤열 명장이 HD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에서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HD현대

국내 조선업 분야에서 최초의 부자(父子) 명장이 배출됐다. HD현대중공업에서 나란히 근무한 고윤열(67) 명장과 고민철(43) 명장이다. ‘부자 명장’은 조선업을 넘어 국내 제조 업계에서도 최초다. 아들은 “아버지 뒤를 이어 한국 제조업 현장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고, 아버지는 “자랑스럽다. 고맙다”고 했다.

HD현대중공업의 4급 기사(技士)인 고민철 명장은 지난 9일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개최한 ‘2025년 숙련기술인의 날 기념식’에서 판금·제관(製管) 분야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명장은 산업 현장에서 15년 이상 근무하면서 최고의 숙련 기술을 보유한 장인에게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다. 올해 선발된 명장 11명 대부분이 50~60대로, 고 기사는 유일하게 40대 초반의 나이에 선정됐다.

고민철 기사의 명장 선정은 국내 제조업계의 첫 ‘부자 명장’ 탄생으로 주목받았다. 아버지 고윤열 명장은 공고를 졸업하고 1978년 HD현대중공업(당시 현대중공업)에 조선소 기능직으로 입사했다. 이후 40년 이상 조선, 해양 철구조물 제작 현장을 묵묵히 지켰다. 세계 최대 해상 유조선 정박 시설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부터 동해 가스전 생산 설비, 포항제철, 63빌딩 건설, 성수대교 복구 공사 등 굵직한 공사 현장에 모두 참여했다. 2004년 제관 분야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됐고, 석탑산업훈장도 받았다. 45세에 학사모를 쓴 그는 현재 울산과학대 겸임교수로 후학을 키우고 있다.

아들 고민철 명장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인문계고를 나와 울산대 산업공학과에 진학했지만, 중도에 포기하고 ‘고졸 학력’으로 제조 현장에 뛰어들었다. 용접학원에 들어가 기술부터 배웠다. 고씨는 “공부는 10시간씩 앉아 있어도 점수 오르는 게 보이지 않지만, 기술은 한두 시간만 열중해도 빠르게 느는 게 보이더라”며 “이게 내 적성이란 걸 깨달았다”고 했다. 처음엔 아버지도 대학 대신 ‘현장밥’을 먹겠다는 아들을 반대했지만, 결국 든든한 응원자가 됐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책상보다 현장에서 실력을 쌓았다. 판금·제관, 용접, 배관 기능장을 비롯해 모두 14개의 국가 기술 자격증을 땄다. 특허(3건)와 디자인(6건) 등록을 비롯해 사내 핵심 기술도 만들었다. 현재는 고도의 제관 기술이 요구되는 SMR(소형모듈원전)·ITER(국제핵융합실험로) 생산부에서 ITER 제작 생산파트장을 맡고 있다.

ITER은 핵융합 발전의 상용화 가능성을 실증하기 위해 35국이 참여하는 국제 공동 연구개발 프로젝트다. 고 명장은 프로젝트의 핵심 설비인 진공(眞空) 용기를 개발해 세계 최초로 납품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고도의 정밀성이 요구되는 현장에 3차원 측정 기기인 ‘레이저 트래커(Laser Tracker)’를 도입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 점도 인정받았다.

9일 명장 선정식에 아버지는 참석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넘어, 이제는 너 혼자 길을 헤쳐나가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10일 울산의 한 제조 현장에서 전화를 받은 고윤열 명장은 “한국을 이끌어 온 베이비붐 세대가 정점을 찍고 내려가는 지금, 외면받는 뿌리 산업에서 아들이 대를 이어 일하겠다는 것에 감회가 깊다”며 “나중에 ‘아들아, 참 네가 고맙다’고 말해줬다”고 했다. 그는 퇴직 후에도 여전히 중소기업 제조 현장에서 기술직으로 일하고 있다.

고민철 명장은 “현장에서 많은 명장분이 은퇴하면서 젊은이들의 멘토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젊은 세대가 제조업에 관심을 갖고, 희망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