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전 HD현대 정기선 수석부회장이 전남 영암군에 있는 HD현대삼호 조선소를 찾았다. 작업복에 안전화, 헬멧, 보안경, 방진 마스크까지 다 갖춘 차림이었다. 그가 찾은 곳은 조선소에서 가장 사고 위험이 높은 블록(선박 부품) 제조 현장. 대형 블록을 만드는 육상 건조장으로 용접, 취부(판재 고정 작업) 등 작업이 약 20m 높이에서 주로 이뤄져 추락, 감전 등 사고 위험이 높은 곳이다.
정 수석부회장을 포함한 그룹 최고경영자(CEO)가 조선소를 찾는 경우는 대개 ‘VIP 고객’인 해외 선주(船主)를 안내하거나 상징성이 큰 선박을 진수할 때다. 하지만 이날 방문 일정은 ‘안전 점검’에 초점을 맞췄다. 현장을 둘러본 정 수석부회장은 조선소 안전팀장들과 만나 “중대 재해를 ‘제로’로 만들 때까지 현장 중심의 경영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HD현대는 모든 계열사가 동시에 대표이사 주관으로 현장 안전 점검을 벌였다. 또 조선 사업에 오는 2030년까지 약 3조5000억원의 안전 예산을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그룹 핵심 조선사 HD현대중공업의 연간 영업이익(2024년 7052억원)에 맞먹는 예산을 매년 안전에 투자하는 것으로, 전례 없는 규모다.
산업 현장에서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자 주요 그룹들이 고강도 ‘안전 대책’ 마련에 전방위로 나서고 있다. 현 정부가 산업재해 예방·엄벌 기조를 강화하면서 기업들의 긴장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기 때문이다.
◇조선소 안전에 3.5조 투자
포스코그룹도 창사 이래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안전을 강화하고 있다. 장인화 회장은 지난 2일 스위스를 찾아 세계 최대 안전 컨설팅 전문 업체 SGS와 ‘안전 관리 체계 혁신’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회사는 안전 컨설팅 등으로 한 해 10조원에 육박하는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다. 실무진이 아닌 그룹 회장이 직접 찾아간 것은 그룹 차원의 안전 중시 기조를 강조하고, 선진적인 안전 관리의 필요성을 체감하기 위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포스코그룹은 우선 인명 사고가 연달아 발생했던 건설 계열사 포스코이앤씨를 대상으로 이달 중 안전 진단을 시작하고, 향후 그룹 전체의 안전 수준을 높일 방침이다. 또 그룹 차원의 안전 관리 전문 회사를 설립하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방문해 안전 문제를 질책했던 SPC그룹도 2조 2교대 근무를 폐지하고, 3조 3교대 근무를 도입하기로 했다.
각 기업들이 앞다퉈 사업장 점검과 대규모 안전 투자에 나서고 있지만, 사고를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다는 게 제조업 현장의 딜레마다. 고령 인력, 의사 소통에 한계가 있는 외국인 근로자가 늘면서 “언제 또 사고가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3일 한화오션 조선소에선 선주사에서 파견한 브라질 직원이 사고로 사망했고, GS건설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도 중국인 근로자가 작업 중 추락해 사망했다.
◇경영계 “정부, 사후 제재 대신 사전 예방”
정부는 최근 주요 건설사 CEO들을 긴급 소집해 산업재해 대응을 주문했고, 고용노동부도 사실상 ‘산재와의 전쟁’에 나선 상황이다. 하지만 공공 현장에서도 사고는 잇따르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경영자총협회는 4일 정부에 ‘중대 재해 감축을 위한 경영계 건의서’를 제출했다. 경총은 “세계 최고 수준의 규제와 처벌에도 불구하고 사망 재해 감소 효과는 미미했다”며 “사후 제재 중심에서 사전 예방 중심으로 정책 기조를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경총은 “새 정부가 마련 중인 ‘노동안전종합대책’이 중대 재해 발생 및 법 위반 기업에 대한 수사·처벌과 과징금 부과, 영업정지 및 등록 말소 등 경제 제재에 집중돼 있다”며 “산재 예방 실효성 없이 기업의 경영 활동을 크게 위축시킬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