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최근 한 달 새 미국에 20일 넘게 체류했다. 이 기간 삼성전자는 테슬라, 애플이 발주하는 대규모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계약을 연이어 수주했다. 이 회장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 창업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도 수차례 만나 사업 협력을 논의했다. ‘한미 관세 협상’과 ‘한미 정상회담’ 같은 국가 현안을 위해 두 차례 미국행(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 임명식’ 참석을 위해 잠시 귀국했던 그는 수일 후 다시 출장길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 7월 ‘부당 합병, 분식회계 의혹’ 사건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돼 긴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난 이재용 회장이 숨 가쁜 한 달을 보냈다. 그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부진에 빠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에 잇단 낭보를 안겼다. 지난달 31일 오전 1시 넘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이 회장은 “일 열심히 해야죠”라는 한마디로 지난 한 달을 압축했다.
◇‘글로벌 네트워크’ 바탕 성과
삼성전자의 잇따른 수주 과정에서 이 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큰 힘이 됐다. 지난 7월 말 테슬라와 23조원 규모의 파운드리 계약을 체결했을 때도,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본인의 소셜미디어에 “삼성과의 파트너십 논의를 위해 회장(chairman)과 화상 회의를 했다”고 적었다. 이 회장과 회의를 했다는 의미다.
지난달 애플의 차세대 반도체 칩을 생산, 공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한 달쯤 전인 7월 초 이 회장은 미국 아이다호주(州)에서 열린 ‘앨런&코 콘퍼런스(선밸리 콘퍼런스)’에 참석해 글로벌 비즈니스 인사들과 긴밀하게 교류했다. 이 행사에는 팀 쿡 애플 CEO, 빌 게이츠도 참석했다. 이 두 건의 계약이 성사되면서, 그간 ‘고객 부족’에 시달려왔던 미국 텍사스의 삼성 파운드리 공장들은 활기를 찾게 됐다.
가장 주목을 받은 건 지난달 25일(미 현지 시각) 미 워싱턴DC의 한미 비즈니스 행사에서 있었던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포옹’이었다. 이 회장은 10여 일 전 황 CEO를 만나, HBM(고대역폭 메모리)을 비롯한 AI(인공지능) 사업 협력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포옹을 한 것이다.
관세 협상과 한미 정상회담에서 정부와 ‘원팀’을 이뤄 활동한 것은, 이 문제들이 국가적 과제인 동시에 삼성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어서다. 올 상반기 삼성전자의 매출(110조3003억원)에서 미주 비율은 30.3%(33조4759억원)로 가장 높았다.
특히 삼성전자는 HBM 납품에서 경쟁사인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에 뒤처져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이 뛰는 모습은 강력한 사업 지원인 동시에, 삼성 내부 임직원의 분발을 자극하는 메시지 역할도 할 것”이라고 했다.
◇삼성의 경쟁력 재건 과제
국내외 현장에서 해외 인사들과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이 회장은 아직 공개 행보를 삼가고 있다. 출장길 공항에서 잠깐씩 기자들을 조우하는 정도다. 삼성전자의 상황이 여전히 녹록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삼성은 반도체, TV·가전 등 ‘세계 1등’이었던 사업의 경쟁력이 상당 부분 무너졌고, 트럼프발(發) 관세 폭탄에, 내부적으로도 상법·노란봉투법 개정 등 큰 불확실성에 직면한 ‘복합 위기’ 상태다.
지난달 중순 미국 출장에서 돌아오면서, 출장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 회장은 “내년도 사업 준비를 하고 왔다”고 답했다. 삼성전자의 내년도 사업 포커스는 단기적으로는 반도체 경쟁력 회복과, 애플의 참전이 예상되는 폴더블 시장에서의 승기 확보가 될 전망이다. 기존 주력 사업과 연계할 수 있는 로봇과 전장(電裝), 냉난방 공조 분야 경쟁력을 확보하고, AI 중심의 수익 모델을 발굴하는 과제도 놓여 있다. 그룹의 새 먹거리인 ‘바이오’ 분야에서도 이 회장의 강력한 네트워킹을 바탕으로 글로벌 기업과의 협업, 인수·합병(M&A) 등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