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현지 시각)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이 마무리됐지만 관세 협상을 둘러싼 진통은 계속될 전망이다. 미국은 현재 25%인 자동차와 차 부품 관세를 언제부터 지난번 관세 협상에서 합의한 15%로 인하할지 밝히지 않고 있다. 대미 투자 펀드나 농산물 시장 개방 등 민감한 분야에선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두 나라 사이에 일부 이견이 있다는 게 드러났다.
◇투자 금융 패키지, 협상 진통 예상
투자 펀드는 조선 분야에 1500억 달러, 에너지·핵심 광물·배터리·반도체·의약품·AI 등 전략 산업 분야에 2000억달러 규모로 각각 조성되는 것으로, 지난 관세 협상의 핵심이자 양국 입장 차가 가장 극명한 사안이다. 이날 정상회담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용범 정책실장은 관련해 “구속력 없는 양해각서(MOU)로 (펀드) 조성 및 운용(방식) 등을 규정하기로 합의했다”며 “큰 틀에서의 합의가 상당 부분 진전된 만큼 앞으로는 기획재정부 국제경제관리관, 금융위원회 등이 실무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논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다만, 김 실장은 “미국 쪽은 미국이 원래 구상하는 방향으로 MOU가 빨리 마무리되길 희망하지만 우리는 우리 국익을 지키는 차원에서 문제 제기 등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협상 타결 이후 펀드 조성 및 운용과 관련한 장관급 회의가 10여차례 진행됐다고도 했다. 진통이 있음을 암시한 대목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사안인지 밝히지는 않은 채 “한국이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우리는 합의 내용을 고수했다”고 했는데, 이게 바로 투자 펀드 협상을 가리키는 것이란 풀이도 나온다.
투자 펀드와 관련, 현재 우리 정부는 직접 투자액 5% 내외에 나머지를 대출·보증 등으로 조성하는 ‘투자 패키지’라는 입장이지만, 미국은 직접 투자액을 최대한 늘리고 구체적 이행 계획도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또 수익 배분에 대해서도 미국은 투자 이익 90%가 자국에 귀속된다고, 우리 정부는 ‘재투자의 개념’이라고 각자 해석하고 있다.
◇알래스카 프로젝트, 한국도 참여?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 참여 압박이 재점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양국에 에너지 분야에서 협력이 가능하다고 발언하던 중 돌연 “한국과 알래스카 프로젝트 관련 논의도 진행하고 있다”고 말한 것 때문이다.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은 알래스카 북부 가스전에서 시추한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1300㎞ 떨어진 남부 니키스키까지 옮겨 수출하는 걸 목표로 하는 440억달러(약 60조원) 규모 프로젝트다. 트럼프 대통령은 8년 전 첫 집권 당시부터 주변국에 이 사업 참여를 촉구해왔다.
다만 우리 정부 관계자는 “실무 선에서는 알래스카 에너지 구매 요청이 있었으나 사업성을 판단할 기초 자료 등을 아직 받지 못한 상황”이라며 “알래스카 프로젝트 투자, 참여 등은 그간 논의되거나 요청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국내 가스업계 사업자들도 트럼프 대통령의 합작 투자 발언 이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주시하는 분위기다. 이 사업은 2014년 미국 알래스카가스라인개발(AGDC) 주도로 글로벌 석유기업 엑손모빌과 BP 등이 참여했다가 현재는 AGDC만 남고 업체들은 떠난 상태다. 수익성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해서다. 이렇다 보니 국내 기업들도 수익성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서 투자 압박을 받으면 난감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에너지 업계 고위 관계자는 “10여년 전 엑손모빌과 BP가 사업 참여를 선언했을 때 국내 주요 에너지 기업들도 이 프로젝트의 사업성을 검토했고, 애매해서 접은 바 있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알래스카 가스전뿐 아니라 주변 지역 투자 우선권 등 여러 당근을 제시한다면 돈을 벌어야 하는 기업으로선 충분히 재검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는 에너지 안보와 공급선 다변화 측면에서 의미가 있지만, 대규모 장기 사업인 만큼 사업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업계에서는 향후 정부 방침 등을 지켜보면서 참여 여지를 모색할 것”이라고 했다.
◇농산물 재개방 압력 계속될 듯
최대 쟁점 중 하나인 쌀·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의 경우 정상회담 테이블에선 아예 거론되지 않았다고 대통령실은 밝혔다. 하지만 러트닉 상무장관은 정상회담 직후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행사에서 “미국은 시장 개방을 원한다”며 “우리(미국) 농민과 제조업자, 혁신가를 위해 시장을 계속해서 개척해 나갈 것”이라고 발언했다. 사실상 추가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지난달 협상에서 양국 정부가 미국산 과일·채소류 수입 위생 검역 절차 개선 관련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한 만큼, 앞으로 이 품목 수입 시점을 당겨달라는 요구가 거세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트럼프 미 대통령이 농·축산물 문제를 언급 안 한 건 한국에 대한 ‘배려’ 차원으로 보인다”며 “협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통상 관계자는 “협상 타결이 됐어도 미국은 매년 국별 무역장벽보고서(NTE) 등을 통해 기회가 될 때마다 자국에 유리한 시장 개방, 규제 철폐를 계속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