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진영에서는 스테이블코인(sta-blecoins·법화나 자산과 교환 비율을 고정한 암호화폐)이 실물경제 활동에서 물품 대금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는 사례를 들어, 이를 사실상 ‘준(準)화폐’로 간주하고 있다. 블록체인상에서 토큰이 한 번 이전되면 제삼자가 번복하거나 수정할 수 없고, 참여자 간 합의로 거래 내역이 확정되는 구조가 ‘거래의 불가역성’ ‘지급 결제의 최종성(finality)’을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 소장은 이에 대해 7월 16일 인터뷰에서 “블록체인의 ‘최종성’은 정보기술(IT) 시스템이 오류 없이 데이터를 일관되게 처리한다는 의미로, 민간 화폐의 신용 리스크를 제거하는 금융적인 지급 결제의 최종성과는 전혀 다른 개념” 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은행 예금을 통해 거래가 이뤄진다 해도, 진정한 의미의 결제 완료는 중앙은행 예치금을 통한 최종 정산이 이뤄져야 한다”며 “기술적으로 안전하게 이체되었더라도, 민간 화폐만으로는 결제의 최종성을 구현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임 소장은 “블록체인 기술은 중앙기관 없이 거래 참여자 간 신뢰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급 수단으로서 화폐 기능까지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기술의 안정성과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별개의 차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블록체인 기반 시스템이 아무런 오류 없이 작동하더라도, 예금자 보호, 지급준비제도, 중앙은행의 통화관리 등 공공 신뢰 체계를 대신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뱅크런(bankrun·대량 예금 인출) 등 금융 시스템의 위기는 IT 오류가 아니라, 신용과 신뢰의 붕괴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미국의 ‘지니어스법(GENIUS Act·미 스테이블코인 혁신법)’으로 스테이블코인의 제도권 편입이 이뤄진 것 아닌가.
“맞다. 다만, 이것이 기존 금융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바꿀 이벤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페이팔(PayPal) 등 ‘머니 서비스 비즈니스(MSB)’ 형태의 지급 결제 수단이 이미 다양하게 있다. 지급 결제 시스템이 파편화돼 있고, 주(州)별로 규제 방식이 달라, 소비자 보호 측면에서 연방 차원의 규제 수단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니어스법은 이러한 요구에 대한 첫 제도적 응답이다. 미국 학계 일각에서는 지니어스법이 스테이블코인만 대상으로 하고 있을 뿐, 다양한 전자화폐 서비스를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달러에 대한 글로벌 수요 확대가 미국에 유리하다는 판단 그리고 미국 암호화폐 업계의 이해관계가 결합한 결과지만, 기존 통화·지급 결제 시스템을 본질적으로 혁신하는 조치는 아니다.”
미국 업계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지점은.
“기본적으로 암호화폐의 제도권 진입, 기존 금융기관의 암호화폐 관련 사업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지니어스법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준비금 전액을 달러 현금, 단기 미 국채, 또는 7일 이내 환매조건부채권(RP) 등으로 보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제는 중국계 암호화폐 거래소와 연관된 테더(USDT)에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테더는 그동안 준비금의 투명성과 구성 자산을 둘러싼 논란이 많았다. 반면, 서클(USDC)은 이미 투명성과 안정성을 강조해 온 만큼 상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선 이런 규제를 달러 패권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 효과는 아직 불확실하다.”
국내의 달러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원화 통화 주권을 위협한다는 우려도 있다.
“과연 그럴까?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기존에 달러가 필요한 사용자다. 은행을 거치지 않고, 블록체인으로 간편하게 달러를 사용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하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늘어난다고 해서, 외부로부터 달러 유동성이 폭증하거나 환율·통화정책을 흔드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통화 주권이 훼손된다는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통화 주권을 지키기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근거가 빈약하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편의점에서 결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가능성이 작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튀르키예처럼 법정화폐 가치가 불안정한 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실물경제에서 결제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지급 결제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고, 원화의 신뢰도와 안정성이 높기 때문에, 스테이블코인이 일상적인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을 환경이 아니다. 스테이블코인은 아직 보편성과 안정성 측면에서 화폐의 기능을 대체하기 어렵다.”
스테이블코인발 금융시장 불안 가능성은.
“2023년 초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가 대표 사례다. 서클이 준비금 일부를 SVB에 예치했었는데, SVB가 유동성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USDC가 일시적으로 1달러 밑으로 떨어지는 ‘디페깅(de-pegging)’ 현상이 발생했다. 대규모 상환 요구를 충당하기 위해 준비자산을 매각했고, 이 과정에서 단기금리가 급등하는 등 시장 불안이 가중됐다. 규모가 큰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위기 상황에서 복원력이 충분한지 의문이다. 미국에서는 관련 연구가 활발하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이 단기국채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주요 분석 대상이 되고 있다.”
담보를 단기 국채 등으로 특정하면 불안정성이 완화되지 않나.
“암호화폐 시장이 불안해지고 스테이블코인에 대규모 상환 요구가 몰리면, 발행사는 준비금으로 보유한 단기국채를 매도해야 한다. 이로 인해 국채 시장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시스템 리스크를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은행과 달리 스테이블코인에는 예금보험이나 중앙은행 유동성 지원 같은 안전장치가 없어, 디페깅이 발생하면 중앙은행이 개입하기도, 외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담보 자산을 중앙은행에 예치하면 안전하지 않나.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민간 발행 스테이블코인’이 아니라 사실상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가 된다. 지급을 중앙은행이 담보하는 구조는 법정통화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영국은 일정 규모 이상의 스테이블코인을 ‘시스템적으로 중요한(systemic)’ 코인으로 지정하고, 준비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Plus Point
자본금 5억원 이상 기업에 스테이블코인 허용? 이창용 “‘한은 주도, 은행 중심 발행’ 추진해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에 발의된 디지털자산법은 자본금 5억원 이상이고 금융위원회 인가를 받은 사업자라면 누구나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금융 혁신을 제도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취지지만,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이 지나치게 완화되면 ‘사설 화폐 남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이창용 한국은행(한은) 총재는 7월 10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비은행 기관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도록 허용할 경우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민간이 발행하는 화폐가 난립하면, 각기 다른 가치의 화폐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19세기 ‘민간 화폐 혼란기’같은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러한 혼선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수행을 어렵게 하고, 결국 중앙은행 시스템에 부담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한은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최근까지 ‘예금 토큰’ 실험을 통해 통화 주권을 공공 영역에서 유지하면서도 디지털화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 왔다. 예금 토큰은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의 지급준비금을 기반으로 발행하는 계좌 기반(account-based) 디지털 화폐로, 블록체인 및 스마트 콘트랙트 기능을 일부 도입하되 기존 금융 인프라 안에서 통제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국정 과제로 본격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 한은의 예금 토큰 실험은 추진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총재는 “신뢰할 수 있는 주체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야 하며, 한은이 주도하고 은행 중심으로 추진해야 한다”며 은행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은행권만 하더라도 한은이 통제할 수 있는 네트워크에서 발행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한은) 외부 플랫폼을 활용하는 것이 더 나은지를 신중히 고민하고 있다”며 “시간을 두고 테스트해 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