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한국에 대해 연일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29일(현지 시각) 미 CNBC방송에 나와 “미국과 합의할 수 있는 ‘가격’은 지금 명확하다”며 “완전한 시장 개방이다”고 말했다. 같은 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트닉 장관이 김정관 장관 등을 만나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시할 최종 제안 때 모든 걸 쏟아부은(bring it all) 제안을 가져와야 한다’며 ‘최고이자 마지막(best and final) 제안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앞서 구윤철 경제부총리와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러트닉과 29일 2시간가량 협의를 진행했지만 ‘투자 금액’ ‘시장 개방’ 등을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일본·유럽연합(EU)과 협상이 타결된 뒤 러트닉 장관은 ‘대규모 투자’를 더 압박하는 듯하다“고 했다. 러트닉은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가진 한국과의 추가 협상 때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EU, 일본, 영국 등 주요 파트너들과 합의한 상태이기 때문에 왜 한국과 새로운 협정이 필요한지 납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장관과 여 본부장은 스코틀랜드 현지에서 긴급 통상 점검 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해 협상 결과를 보고했다. 이후 ‘수정안’을 들고 구 부총리와 함께 워싱턴DC에서 러트닉 장관을 마주했지만, 4000억달러 투자 펀드 조성과 천문학적 규모의 미국산 물품 구매를 요구하는 미 측과 평행선을 달렸다.
◇“트럼프 설득하려면 다 쏟아부어라”
우리 정부는 당혹스러운 분위기다. 경제 규모 면에서 일본은 한국의 2.5배에 이르지만 미국은 한국에 같은 규모의 투자 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30일 “(미국이 요구하는 규모가) 총액 기준으로 일본보다 더 적은 게 아닌 것 같다”며 “그래서 정부가 양보를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내에선 “차라리 관세를 내고 추가 협상을 하는 게 낫다”는 격앙된 반응도 나온다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구 부총리를 비롯한 협상단으로부터 화상 보고를 받고 격려하면서 “어려운 협의인 것은 알지만 우리 국민 5200만명의 대표로 그 자리에 가 있는 만큼 당당한 자세로 임해 줄 것”을 당부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우리가 감내 가능한, 미국과 한국의 상호 호혜적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 중심의 (합의) 패키지를 만들어 실질적 논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는 당초 우리 기업들의 대미 투자 계획 1000억달러에 수출입은행, 한국무역보험공사 등 금융 공기업들이 투자·대출·보증하는 금액을 더해 2000억달러 규모 계획을 제안해 왔다. 여기에 한국의 강점인 미국 조선 재건을 위한 양국 협력, 반도체와 배터리 등 첨단 산업과 희토류 및 의약품 등의 ‘공급망 동맹’ 강화 등을 제시해 일본·EU 수준의 관세 인하를 얻어내겠다는 전략이었다. 한 소식통은 “우리 입장에선 한국의 대미 투자 약속은 일본 절반 수준이 적절하지만, 미국 입장에선 한일은 수출·무역 적자 규모가 비슷한 교역국일 뿐인 것 같다”고 했다.
◇결국은 대통령 결단 필요
정부는 그동안 협상안에 포함돼선 안 될 ‘레드라인’으로 분류했던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 쌀·소고기·사과 등 농축산물을 모두 테이블에 올렸다. 30~31일 이틀 동안 구윤철 부총리와 김정관 장관, 여한구 본부장 등이 러트닉 미 상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과 추가 협상을 이어간다. 시한 마지막 날인 31일엔 구 부총리와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조현 외교부 장관과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의 양자 협상도 각각 예정돼 있다.
재계 총수들의 현장 지원도 시작됐다. 조선 협력 계획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김동관 한화 부회장에 이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까지 워싱턴DC에 집결했다. 이 회장과 정 회장의 경우 반도체와 자동차 분야 투자·협력과 관련해 정부 협상을 지원할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의 대표 ‘미국통’인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도 지난주부터 미국을 찾아 상·하원 의원들을 만나며 협상 타결을 막후 지원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