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우리 정부에 4000억달러(약 550조원) 안팎 규모의 투자 펀드 조성을 요구한 것에 대해 통상 전문가들은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할 때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펀드라면 윈-윈 모델이 될 수도 있다”면서 “펀드를 조성한다면 자동차·철강 등 주요 수출 품목에 적용되는 관세에 대한 미국의 감면 확답을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막대한 재원 조달과 관련해서는 “펀드 규모가 큰 만큼 장기적 기금 조성 목표액을 제시한 뒤 투자 계획 등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4000억달러는 우리 정부 1년 예산 절반을 훌쩍 넘는 규모인 반면 트럼프 행정부발 관세 정책의 불확실성은 너무 큰 상황”이라며 “펀드 조성이라는 카드에 대해 미국은 어떤 걸 줄지 확실하게 보장받아야 한다”고 했다. 허 교수는 “미국은 높은 관세, 거액의 기금 조성 등을 먼저 요구한 뒤 상대 반응을 살피는 협상 전략을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며 “통상·안보 등 다양한 ‘패키지 딜’을 활용해 기금 규모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고 했다.
막대한 기금 조성 방안에 대해선 한국투자공사(KIC) 같은 금융 공기업, 미국 투자를 추진하는 기업, 정부 간에 역할과 수익·리스크를 분담하는 ‘혼합형 모델’이 바람직하다는 분석이다. KIC는 국내 유일의 해외 투자 전문 기관으로, 작년 말 기준 운용 자산이 2065억달러(약 280조원 이상)에 이른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펀드 규모가 매우 큰 만큼 민·관이 역할을 분담하고 거액의 기금을 한 번에 조성하는 대신 장기적 기금 조성 목표액을 내놓고 연차별 투자 계획 및 분야 등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편이 현실적”이라고 했다.
미국이 유독 한국과 일본에 대미 투자 펀드라는 방안을 요구한 것은 경제력·기술력을 두루 갖춘 한일 두 나라와의 제조업 협력을 더 강화하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장은 “투자 펀드를 조성한다면 관세 인하라는 대가를 챙기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공급망 등 다양한 경제 안보 분야에서 미국과 우방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의 거센 추격으로 인해 한국 제조업 경쟁력이 급속히 추락할 위기인 만큼,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회복하고 새 먹거리가 될 신산업 분야를 개척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