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흑연에 97%를 의존하는 국내 배터리 업계가 한숨을 돌렸다. 내년부터 중국산 광물을 쓴 배터리를 제재하기로 했던 미국 정부가 흑연에 한해선 2년을 유예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흑연은 이차전지의 핵심소재인 음극재를 구성하는 핵심광물이다.
제도가 예정대로 시행됐다면 중국산 흑연에 의존도가 높은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매출이 급감할 우려가 컸다. 지난해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가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 배터리를 팔아 벌어들인 매출은 10조원에 이른다. 지난해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LG엔솔은 세계 2위, 삼성SDI는 4위, SK온은 5위로 3사 합계 점유율은 31.7%였다.
미국은 2022년부터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현지에서 생산한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부품·광물 요건을 강화하며 글로벌 전기차 공급망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보조금을 받는 전기차 모델 36종 가운데 30종에는 한국 업체가 만든 배터리가 탑재되고 있다.
◇흑연 한정 2년 유예할 듯
3일 미국 폴리티코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이날 발표할 IRA 전기차 세액공제 관련 최종 규정에서 중국산 흑연 금지에 대한 유예조치를 포함할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미 정부는 차량 당 7500달러(약 1025만원)에 이르는 전기차 보조금을 받으려면 배터리 부품은 올해부터, 핵심 광물은 내년부터 중국 등 해외우려기관(FEOC· Foreign Entity of Concern)에서 조달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미국 현지에서 전기차를 생산하고, 배터리를 조립하더라도 FEOC에서 만든 부품·광물이 들어 있으면 보조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했다. 중국산 부품·광물의 사용을 막아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독일 BMW와 폴크스바겐, 우리나라의 현대자동차 등 주요 자동차 업체들이 흑연의 경우, 중국 외 지역에서 조달이 어렵다는 점을 호소하자 미 정부가 제도 시행을 미루기로 한 것이다. 미국 재무부와 에너지부는 최종 규정에서 흑연을 ‘원산지 추적이 불가능한(non-traceable) 광물’로 분류해 FEOC에서 조달해도 2027년 초까지는 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으로 알려졌다. 흑연은 이차전지 4대 핵심소재(양극재·음극재·전해질·분리막) 중 하나인 음극재를 구성하는 핵심 원료로, 중간 원료인 구형흑연은 99%가 중국산이다.
국내 배터리 업계에는 희소식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흑연 때문에 한국 배터리가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하면 싼 가격을 앞세운 중국 배터리가 시장을 휩쓸 것이란 우려가 컸다”며 “지난해 국내 3사의 미국 시장 배터리 판매는 10조원에 달했는데 만약 유예가 없다면 매출 급감이 불 보듯 뻔했다”고 했다. 내년부터 미국 현지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예정인 현대자동차도 흑연 규정이 유예를 받으면서 최대 7500달러에 이르는 전기차 보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산 확산 역효과 우려
유예의 배경에는 대(對) 중국 압박이라는 IRA 보조금 제도의 목적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어차피 흑연 때문에 보조금을 못 받게 되면 그동안 니켈, 리튬 등에서 탈(脫) 중국에 나섰던 배터리·소재 업체들이 흑연 외 다른 광물에서도 다시 중국산을 찾을 것으로 예상됐다”며 “미국 정부로선 역효과가 나는 상황을 막으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다만 한시적인 유예라는 점에서 국내 배터리·소재 업체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진다. 올 2월 SK온은 미국 웨스트워터와 2027년부터 흑연 공급 계약을 맺고, 포스코퓨처엠은 3월 초 호주 시라리소시스와 아프리카 모잠비크산 흑연을 앞으로 들여오기로 했다. 박재범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유예는 됐지만 남은 기간 공급망을 구축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면 다시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