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출신 로미오 발란(39)씨. HD현대중공업의 협력사 세화이엔지 소속으로 울산 조선소에서 4년째 엔진설비 기능공으로 일하고 있다. 2019년 어렵게 한국 취업 비자를 발급받고서 그는 한동안 한국행 포기를 고민했었다.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가 위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혼자 투병 생활을 할 어머니가 걱정됐지만 한국에서 일해야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기에 울산으로 왔다. 발란씨는 “지난달 어머니 건강이 안 좋아져 잠시 고향에 다녀왔는데, 건강을 회복한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런 발란씨가 27일 울산 HD현대중공업 조선소 안에 있는 ‘영빈관’을 찾았다. 한 척당 수천억 원에 달하는 선박을 주문하는 선주(船主) 등 ‘VIP’를 모셔 대접하는 최고급 시설이다. 이날은 특별한 손님 42명이 이곳을 찾았다. HD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용접공, 도장공, 전기공 등으로 일하는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등 7국 출신 직원들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VIP 대접을 받으며 오찬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들을 맞이한 사람은 HD현대 권오갑 회장, HD현대중공업 이상균·노진율 사장, HD현대미포 김형관 사장 등 HD현대의 조선 계열사 최고 경영진이었다. 이날 행사를 위해 서울에서 울산까지 내려왔다. 회사는 외국인 직원을 위한 여러 행사를 열어왔지만 ‘영빈관’ 초청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 계열사가 직접 고용한 직원 외에도 협력사 33사 소속 직원들까지 초청했다. 오찬 메뉴로 해산물볶음, 버섯불고기, 삼계탕, 계절과일 코스를 준비했다. 종교 등 이유로 식단 제약이 있는 직원들을 고려해 미리 꼼꼼히 메뉴를 챙겼다.
이날 오찬에 참여한 스리랑카 출신 용접공 루메시 프리야랄(31)씨는 올해 8월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이다. 그는 “가난한 형편에 신부 쪽에 보낼 결혼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어 결혼은 애초 포기했었다”며 “작년 12월 한국 조선소에 취업한 뒤 고향 마을이 난리가 났다”고 했다. 프리야랄씨는 “사실 연애 한번 못해봤는데 얼마 전 화상으로 선을 봐 올해 8월 결혼한다”며 “열심히 일해서 고향에 집 한 채 마련하고 돌아가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직종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한국 조선소에서 일하면 월 300만원 급여를 받을 수 있다. 모국 대비 5배 수준에 달하기도 한다.
HD현대가 협력사 소속 외국인 직원까지 고르게 초청해 영빈관 행사를 연 이유는 한국 조선소 현장에서 외국 인력이 그만큼 중추 인력이 됐기 때문이다. HD현대 계열사 조선소에서만 외국 인력 8700여 명(협력사 포함)이 일하는데, 전체 직원의 약 10% 달한다.
HD현대 관계자는 “과거 파독 광부, 간호사로 일하면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했던 우리 옛 모습과 비슷해 회사에서도 더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고 했다. 지난 6일에는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 직원들의 현지 가족까지 챙겼다. 베트남에서 호텔을 빌려 외국인 직원의 가족들을 초청해 감사 행사도 열었다. 최근 몇 년간 조선업 호황을 맞았지만 인력난에 시달려 납기 지연 등 문제가 벌어졌을 때, 타국에서 들어와 도움을 준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HD현대 조선 계열사 경영진들은 이날 오찬을 마치고 영빈관 앞 조선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잔디밭에서 산책도 함께 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업무 현장뿐 아니라 퇴근 후 생활과 관공서 행정 업무까지 돕는 회사의 통역 지원 등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권오갑 회장은 “회사는 여러분이 가족 품으로 돌아갈 때 건강하게 금의환향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여러분의 안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해 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