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주의 펀드들의 표적이 된 한국 기업 수가 5년 연속 증가해 지난해 77사에 달했다. 2019년(8사)의 10배 수준으로 급증한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단기 차익을 노린 행동주의 펀드들의 표적이 되면, 장기 성장 전략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래픽=양진경

25일 한국경제인협회가 김수연 법무법인 광장 연구위원(법학 박사)에게 의뢰한 ‘주주 행동주의 부상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행동주의 펀드들이 주목하는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는 단순 투자를 넘어, 배당 확대 등을 요구하는 식으로 기업 경영에 적극 개입하며 주로 단기 주가 부양을 노린다.

지난 2019~2022년 행동주의의 표적 1위는 미국, 2위는 일본이었고 3위는 캐나다·영국·독일이 번갈아 차지했다. 그런데 지난해엔 한국이 미국·일본 다음인 3위에 올랐다. 특히 한국은 1년 만에 공격받은 기업 수가 57% 늘었는데, 같은 기간 북미가 9.6% 증가하고, 유럽은 오히려 7.4% 감소한 것과 대비된다.

한국 기업들이 코로나를 거치며 역대급 실적을 냈음에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주가가 저평가돼 있다는 점을 주목한 국내외 펀드들이 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2003년 소버린의 SK 공격, 2015년 엘리엇의 삼성 공격을 경험한 뒤 국내에서 자생한 KCGI, 얼라인파트너스 같은 토종 행동주의 펀드들이 대거 공세에 나서면서,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기업들까지 표적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수연 위원은 “지배 구조가 취약하거나 동종 업계보다 실적이 부진한 기업들이 주로 공격 대상이 된다”며 “최근 사모 펀드·자산운용사 등 기관 투자자들도 배당·자사주 매입 확대, 이사회 교체, 감사위원 선출 등을 요구하는 행동주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행동주의 전략도 더 치밀해지고 있다. 여러 펀드가 공시 의무가 없는 소수 지분을 갖고 있다가 함께 공격하는 ‘울프팩’(늑대 무리) 전술은 최소한의 지분으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최근 삼성물산을 시티 오브 런던 등 5개 운용사가 연합 공격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근 미국에선 여러 펀드가 사전 모의 없이 한 기업을 동시에 공격하는 ‘스워밍(Swarming)’도 증가하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들의 지배 구조 개선 제안, 기업의 성장 방향 제시 등은 필요하지만, 단기 차익만 노린 투기성 펀드들이 과도한 배당을 요구하고 이사회 진입 등 경영 간섭에 나설 경우 기업의 장기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소액 주주들이 활동할 영역을 보장하는 만큼, 경영권을 방어하는 수단도 제공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수연 위원은 “한국은 대주주가 경영권을 방어할 수단이 자사주 매입 외에는 없다”며 “일본은 20년 전 ‘포이즌필(신주 인수 선택권)’ 같은 확실한 경영권 방어 수단을 확보한 상태에서 주가 부양책인 ‘밸류업’을 추진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세계 유일무이한 대주주 규제를 갖고 있는데, 감사위원을 분리 선출 하도록 하면서, 최대 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것이 그것”이라며 “이 제도가 행동주의들의 공략 포인트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수연 위원은 “아직까지 주주 행동주의가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단기 주가 부양을 통해 수익을 얻은 펀드들이 양(量)·질(質)·력(力)에서 점차 강력해질 것”이라며 “행동주의의 과도한 공격에 대응할 기업의 방어 수단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