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한국과 핀란드 정부는 수교 50주년을 맞아 TIPF(Trade and Investment Promotion Framework·무역투자 촉진 프레임워크)를 체결했다. TIPF는 FTA(자유무역협정)의 핵심인 관세 양허(讓許·축소 또는 철폐)를 배제한 포괄적 업무협약(MOU)으로 올 들어 우리 정부가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새로운 개념의 통상 협력 체계다. 지난 1월 아랍에미리트를 시작으로 최근 우즈베키스탄, 핀란드까지 TIPF 체결국은 8국에 이른다.

우리나라 통상 정책이 FTA에서 TIPF와 EPA(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경제동반자협정)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미·중 무역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촉발한 보호무역, 공급망 재편 흐름 속에 경제 우방국 확대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시장 개방이 핵심인 FTA보다는 협력에 방점을 둔 TIPF와 EPA로 무게중심이 옮겨 가는 것이다. 이는 FTA와 함께 세계 무역 질서의 바탕이 됐던 WTO(세계무역기구) 체제가 흔들리고, 자유무역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른바 유사 입장국(Like-minded country)끼리 협력이 강화하는 추세와 맞물려 있다. 허윤 서강대 교수는 “WTO로 만족 못하는 국가들끼리 더 높은 수준의 자유무역을 위해 FTA를 맺어왔지만, 이젠 미국마저 자유무역(free trade) 대신 공정무역(fair trade), 상호주의를 내세울 정도로 통상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며 “각국이 공급망·에너지·무역투자 등으로 통상의 초점을 옮기는 상황에서 우리의 정책도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양인성

◇연말까지 16건, 30국으로 TIPF 확대 추진

우리나라는 2004년 발효된 한·칠레 FTA부터 지난달 초 필리핀까지 22건, 59국과 FTA를 체결했다. 이를 통해 전 세계 GDP(국내총생산)의 85%까지 FTA 네트워크를 통해 경제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상호 시장 개방이 핵심인 FTA는 협상 과정이 수년 걸리고 국회 비준 과정도 거쳐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TIPF는 구속력은 없지만 공급망 등 다양한 통상 이슈를 다룰 수 있고, 행정부 차원에서 손쉽게 맺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 미국의 반도체법과 IRA(인플레이션감축법) 제정, EU의 핵심원자재법과 CBAM(탄소국경조정제도) 시행, 중국의 갈륨·게르마늄 수출 통제 등으로 대표되는 보호주의의 확산 속에 우리가 세계 시장에서 여러 국가와 협력을 강화할 새로운 통상 체계로 여겨진다.

그래픽=양인성

상대국과 특정 분야에서 협력이 필요하거나 EU(유럽연합)·아세안 같은 경제권과 이미 FTA를 맺었지만, 개별 협력이 필요한 국가가 TIPF 대상으로 꼽힌다. 올 들어 TIPF를 맺은 국가 가운데 폴란드·헝가리·핀란드는 EU 회원국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폴란드와 헝가리는 이차전지 등에서 우리 기업들이 투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EU로 묶여 있어 현안 논의가 쉽지 않았던 국가”라며 “TIPF를 통해 국내 기업 진출 과정에서 중요 사안이 발행할 때마다 정부 간 채널을 가동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또 러시아 중심의 EUEA(유라시아 경제 연합), 메르코수르(남미 공동 시장), GCC(걸프 협력 회의) 등 경제 권역으로 묶여 당분간 FTA 체결에 속도를 내기 어려운 국가들도 TIPF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현재 8건을 맺은 TIPF를 연말까지 에티오피아, 카자흐스탄, 브라질, 카리브 공동체(15국) 등 16건, 30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안덕근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TIPF는 현 시점에서 상대국과 윈·윈하는 가장 중요한 협력 방식”이라며 “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각국과 TIPF를 체결하면서 산업 협력 관계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PA도 포스트 FTA로 주목

우리 정부는 포스트 FTA로 EPA도 확대 중이다. EPA는 관세 양허를 포함하지만 시장 개방 강도는 약하고, 공급망 등 산업 협력을 더 강화한 형태를 말한다. 우리나라와 경제 규모 차이가 커 FTA 효과는 크지 않지만, 자원 부국이거나 지정학적 중요성이 큰 국가들이 주요 체결 대상이다.

과거 인도와 CEPA(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한·중·일과 아세안 등이 참여하는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을 체결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산업 협력에 방점을 찍고 추진하는 EPA는 몽골·조지아 등이 최초다. 정부는 EPA도 개방에 거부감이 큰 신흥국을 대상으로 시장 개방은 일부 품목으로 제한하면서 공급망, 디지털 등 실질적인 협력에 초점을 맞춰 확대할 방침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EPA 대상 국가는 FTA를 맺고 관세를 낮추거나 없애도 우리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며 “관세보다는 양국 간 경제개발 협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FTA·EPA·TIPF

FTA는 전통적인 시장 개방 중심 협정으로 양국이 서로 상품 관세를 없애거나 낮춰 무역을 확대하는 게 핵심이다.

EPA는 일부 품목에 대해선 관세를 없애거나 낮추지만, 이보다는 자원과 에너지 등 최근 중요성이 커지는 공급망 협력에 초점을 맞춘 협정이다.

TIPF는 시장 개방은 다루지 않는 일종의 MOU(업무 협약)를 말한다. 별도로 FTA를 추진하기는 어렵지만, 협력이 필요한 국가를 대상으로 맺는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협상 기간이 짧아 빠른 시간에 확대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