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경기도 용인시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삼성 안내견 사업 30주년 기념식’이 열린 이날 단상 앞에 최근 새 파트너(시각장애인)를 만난 안내견 8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1993년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 선언’ 직후 삼성그룹은 안내견 사업을 시작했다. 이날 행사에서 안내견 8마리는 약 1시간 동안 짖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차분히 파트너 곁을 지켰다. 이날처럼 30년 동안 280마리 안내견이 이곳에서 탄생해 시각장애인과 동행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시각장애인 이경석(26)씨는 올해 5월 두 번째 안내견 ‘단풍’을 만났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국립장애인도서관 직원인 이씨는 대학 입학 후 혼자 통학하기 위해 2016년 첫 안내견 ‘해담’을 분양받았고 이번이 두 번째다. 이씨는 매일 출퇴근, 산책을 단풍이와 함께 하고, 단풍이와 함께 외출하면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도 듣는다고 한다. 은퇴한 해담이는 이씨의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단풍이의 친구가 됐다.
강아지 시절 단풍이를 돌봤던 퍼피워커(돌봄 자원봉사) 김인성씨는 단상에 올라 써온 편지를 읽으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김씨는 “단풍이는 애교가 많아 어디서나 사랑받을 것, 단풍이 많이 사랑하고 응원하고 축복한다”고 작별 인사를 전했다.
이날 행사에는 퍼피워커, 시각장애인 파트너, 은퇴견 입양 가족 등 안내견의 전 생애와 함께해 온 이들과 함께 윌리엄 손턴 세계안내견협회(IGDF) 회장,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배진교 정의당 의원, 홍원학 삼성화재 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도 참석했다. 홍 전 관장은 김 의원에게 “(이건희) 회장님이 살아계실 때 (안내견에) 정말 관심 많으셨다. 오늘 행사를 보셨으면 더 좋아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대학생, 공무원 등 시각장애인 파트너 8명과 이들이 최근 만난 안내견 8마리도 함께했다. 안내견 ‘케미’의 파트너인 장애 인식 개선 교육 강사 최경은씨는 후천성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타인의 도움 없이 출근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일 수 있지만 시각장애인인 제게는 생각지도 못한 일, 무섭고 두려웠던 발걸음이 케미 덕분에 가볍고 하루하루 설렌다”고 했다.
올해 3월 KBS 장애인 앵커로 선발된 허우령 앵커도 이날 기념식에 참석해 안내견 8마리를 직접 소개했다. 김예지 의원은 시각장애인 파트너 3명과 함께 팝송 ‘You Raise me up’ 등 2곡을 연주했다. 세 번째 안내견 ‘조이’와 의정 활동을 함께 하는 김 의원은 “이번 기념식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내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혜광학교 학생 1호 안내견에서 국회의원·앵커 안내견까지
삼성은 1994년 1호 안내견 ‘바다’를 당시 혜광학교 재학생 양현봉씨에게 분양한 이후 30년간 꾸준히 안내견을 키워내고 있다. ‘개 먹는 나라’로 안내견에 대한 인식이 후진국 수준으로 평가돼 좋은 유전자를 가진 안내견 확보도 어려웠고, 공공 장소에 시각장애인과 동행하는 안내견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있었지만, 이건희 회장은 “안내견 사업이 우리 사회의 복지 마인드를 한 수준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사업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2014년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비(國費) 유학을 떠났던 서주영(33)씨의 곁도 안내견 ‘나비’와 ‘아랑’이 지켰다. 유학이 확정된 시기 8세였던 나비는 은퇴를 앞둬 미국 유학 동행은 무리였다. 서씨는 눈물로 나비를 은퇴시키고 2살이었던 아랑이를 만났다. 유학 가기 전 서씨와 아랑의 대중교통 승차 거부가 뉴스를 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 유학에 동행한 아랑은 영어와 우리말을 모두 알아들으며 서씨를 도왔다. 작년 7월 은퇴한 아랑은 퍼피워커 가족과 함께 지낸다.
이날 기념식에 참석한 양지호 목사는 1996년 안내견을 처음 만나 작년까지 총 4마리의 안내견과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안내견들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어떤 악천후에도 함께했다”고 했다. “외출했다 교회로 오는데 누군가 ‘개가 다친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며 “짖거나 걸음을 멈췄으면 바로 알았을 텐데. (안내견) 푸름이는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병원에 가서 들으니 뒷다리 발바닥을 다쳤다고 했다”고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30년 신념으로 이어온 안내견
이후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는 지금까지 안내견 280마리를 분양했고, 현재 76마리가 안내견으로 활동한다. 안내견 1마리를 키워내는 데 1억원 이상 비용이 소요된다. 안내견 280마리는 시각장애인의 삶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 많은 곳의 변화를 불러왔다. 안내견은 생후 훈련 기간 약 2년, 시각장애인 파트너와 활동 기간 7~8년, 은퇴 뒤 노후 돌봄 등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2005년 안내견을 소재로 한 삼성화재의 공익광고 ‘평생을 달리지 않는 개가 있습니다. 발을 밟혀도 짖지 않는 개가 있습니다’라는 문구는 안내견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을 바꿔놓은 전환점으로도 꼽힌다.
박태진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교장은 “아름다운 동행을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