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뉴시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다국적 승강기 업체이자 현대엘리베이터 2대 주주인 쉰들러 그룹과 벌인 소송에서 져 현대엘리베이터에 배상금 약 3000억원(이자 포함)을 물게 됐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30일 쉰들러가 현 회장과 한상호 전 현대엘리베이터 대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현 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에 1700억원과 지연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2014년 소송이 제기됐기 때문에 이자까지 합치면 총배상액이 300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서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대주주가 경영권 강화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더라도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엄청난 배상액을 물게 됨을 분명하게 보여줬다”며 “그동안 ‘대주주 이익이 곧 회사 이익’이라고 간주하던 대기업 경영진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판결이자, 주주 대표 소송으로선 사상 최대 배상금을 물게 한 판결”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한 전 대표는 배상액 가운데 190억원을 현 회장과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 회장뿐 아니라 전문 경영진에게도 손해배상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날 판결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현 회장이 2019년 2심 판결 이후 1000억원을 현대엘리베이터에 선수금으로 지급했기 때문에 나머지 금액 납부에 무리가 없고, 현 회장 중심 경영 체제도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현정은 회장, 현대엘리베이터에 1700억원 배상해야

현대엘리베이터는 현정은(7.8%) 회장 등 최대 주주 및 특수 관계인이 지분 26.5%를 소유하고, 쉰들러는 15.5%로 2대 주주다. 이번 소송은 현대엘리베이터가 2006년부터 주요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다섯 금융사에 현대상선 지분 매입 대가로 연 5.4%~7.5% 수익을 보장해주는 파생 상품 계약을 맺은 것을 쉰들러 측이 문제 삼으며 시작됐다.

당시 현대중공업·현대건설 등 범현대가에서 현대상선 지분을 꽤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현 회장이 우호 지분 확보를 위해 외국 금융기관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의 파생 상품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 쉰들러 측 주장이다. 이 계약 체결 이후 현대상선 주가는 하락했다. 현대상선 주가가 오르면 외국 금융기관과 수익을 나누고, 내리면 현대엘리베이터가 손실을 모두 떠안는 파생 상품 계약에 따라 현대엘리베이터는 7000억원 가까운 손실을 봤다.

쉰들러 측은 “현대엘리베이터가 앞으로 해운 관련 업황이 나쁠 것이라는 전망과 현대상선의 부실을 알면서도 현 회장 개인의 경영권 보호를 위해 이런 계약을 맺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주주 대표 소송을 제기했다. 주주 대표 소송은 경영진의 결정이 주주의 이익과 맞지 않을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표해 경영진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1심은 현대엘리베이터가 체결한 파생 금융 상품 계약이 현 회장의 정상적 경영 행위라고 판단해 쉰들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2심에서는 1심 판결을 뒤집고 현 회장 등이 170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고, 대법원도 이날 같은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은 “제3자가 계열 회사 주식을 얻게 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이사는 소속 회사 입장에서 여러 사항을 검토하고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며 “계열 회사 주가 변동에 따른 손실 가능성 등을 검토하고 파생 상품 계약 규모나 내용을 적절하게 조정해 회사가 부담하는 비용이나 위험을 최소화하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 작지 않은 파장 예상돼

이날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 현대그룹 측에서는 “현 회장의 경영 상황은 이전과 달라질 것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2020년 현대엘리베이터 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2심 판결 이후 현 회장 등은 현대엘리베이터에 1000억원을 선수금으로 지급했다.

재계에서는 그러나 현 회장이 가진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가치가 950억원에 불과하고 특수 관계인 지분까지 합쳐도 약 3200억원 수준인 상황에서 거액 배상 판결이 확정된 만큼, 앞으로 작지 않은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했다.